<님포매니악> 밝히는 게 잘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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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포매니악>에 대한 시네마톡을 가졌습니다. 맥스무비의 이지혜 기자와 함께 대학로 CGV에서 7월 2일 행사를 진행했는데요. 시네마톡 시간에 한 얘기를 러프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문장이 거칠고 맞춤법에서 벗어나는 단어도 많아요. 감안해서 봐주세요.

영화가 시작되면 1분 30초 가량 어두운 화면이 나오죠. <님포매니악 볼륨2>의 끝에는 ‘이 영화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친다’고 나와요. <님포매니악>은 <안티 크라이스트> <멜랑콜리아>와 함께 라스 폰 트리에의 ‘우울 삼부작’인데요. <안티 크라이스트>에서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언급이 나오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도 이렇게 성스럽다고 해야 하나요 그런 분위기로 영화를 열어요. 눈이 흩날리고, 비가 내리는 식으로 도입부를 여는 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1979)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하거든요. 이건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일종의 가이드라인인 거죠. 여기에 이 영화의 도입부의 비밀이 있습니다. 마치 연극 무대 같은 거죠. 연극은 시작하기 전에 먼저 조명을 다 끈 후 얼마 후에 밝아지잖아요. 그처럼 <님포매니악>도 그런 시작을 하고 있죠. 보시면 무대, 즉 세트 같은 이미지이죠.
 
그렇다면 왜 연극 무대 같은 곳에서 시작을 할까요. 이 영화는 ‘색정광’이라는 의미의 <님포매니악>이죠. 하지만 여러분이 보시기에 조가 색정광 같나요? 저는 오히려 섹스의 탐험자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오르가즘을 느끼기 위한 탐험 혹은 여행인 셈인데. 조가 느끼는 오르가즘은 단순한 쾌락과는 거리가 멀어요. 조의 오르가즘은 감정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죠. 아버지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맬 때 두 다리 사이로 체액이 떨어지는데 눈물 같은 의미가 담겨 있죠.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른다는 건 그만큼 섹스에 대한, 오르가즘에 대한 탐구를 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우리 사회를 비롯해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조처럼 그렇게 섹스를 탐하는 건 창녀 혹은 섹스 중독자 같은 비하의 단어로 규정이 되죠. 그래서 행동 반경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사회가 규정한 도덕의 범위를 월담한 탐험자이죠. 아마 그녀가 쓰러진 채 시작한 건 그런 넓은 세계가 아니라 무대와 같은 닫힌 사회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여기서 조와 샐르그먼의 관계를 읽을 수 있죠. 조가 쓰러져 있는 골목, 그리고 셀리그먼의 부축을 받아 이동하는 셀리그먼의 방은 셀리그먼의 무대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의사와 환자, 그리고 창작자와 비평가 혹은 검열관의 관계를 읽었는데요. 조가 이해 못할 이야기라고 얘기하죠. 그리고 굉장히 길다고도 하고요. 하지만 셀리그먼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얘기해요, 길면 좋죠, 라는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에게는 그런 권한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조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셀리그먼은 갖은 지식을 동원해서 조의 사연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님프가 좋은 예죠. 낚시 바늘에서, 곤충의 유충 단계로 넘어가 조의 섹스를 탐험하는 행위를 님포마니악으로 연결 시키죠. 셀리그먼에게 조는 일종의 불안정한 심리를 가진 환자였을 거예요. 이야기는 우연이 난무하고 조는 자신을 일러 나쁜 여자라고 하고요. 마치 정신학적으로 안정을 주는 것 같아요. 셀리그먼이 생긴 꼭 칼 융이나 지그문드 프로이트 같지 않나요. (관객 분의 말씀에 의하면 셀리그먼이라는 실제 정신분석학자가 있다고 하네요.)
 
그의 방만 해도 그래요. 온갖 책들과 명화들과 상징물들이 넘쳐나죠. 하지만 <님포매니악 볼륨2>에서 봤듯이 셀리그먼은 한 번도 성관계를 가져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에요. 이론은 넘치지만 경험은 전혀 없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셀리그먼이 하는 얘기는 모두가 헛소리인 겁니다. 그래서 <님포매니악>은 극 중 셀리그먼처럼 상징으로만 보게 되면 함정에 빠지는 거죠. 왜 여자인데 조는 남자 이름을 갖고 있는 걸까요? 조가 제롬과 첫 관계를 맺을 때 정상위 3번, 후배위 5번을 한 것을 두고 왜 3+5를 자막으로 거대하게 심었을까요? 피보나치 수열이라서? 그 때문에 이 영화는 ‘The’ 가 들어가는 소제목 다섯 개와 들어가지 않는 세 개의 8장 챕터로 이뤄져 있는데요.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냥 그렇게 한 것뿐이죠. 제롬은 그냥 성 관계에 있어서 미숙한 청년입니다. 조의 처녀성을 가져간 후 이들이 하는 행동을 보세요. 제롬이 오토바이 시동을 거는데 애를 먹고 있자 조는 스위치를 하나 건드리는 식으로 오토바이의 시동을 쉽게 가져가죠.
 
섹스에 있어서 여성은 남성들에 비해 적극적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은 하나 같이 소극적입니다. 아니 표현을 바꿔볼까요.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어른 아이들 같아요. 배우의 캐스팅 자체가 그렇죠. 제롬 역은 <트랜스포머>의 청년으로 유명한 샤이어 라보프이고요. P역의 제이미 벨은 <빌리 엘리어트>의 그 친구입니다. 이와 같은 캐스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잠시 주제를 벗어나서 남녀의 신체 구조 얘기를 해볼까요. <처녀들의 저녁 식사>(1998)를 기억하시나요? 이 영화에서 극 중 진희경은 자신의 감춰진(?) 성기를 보기 위해 화장실에서 망측한 포즈를 취하다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합니다. 자기 성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성기를 거쳐 섹스에 대한 탐험을 합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다르죠. 남자들은 너무나 쉽게 자기들의 성기를 봐요. 탐험할 필요가 없어요. 섹스도 대개는 성적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만 한정이 되죠. 조처럼 오르가즘에 희로애락의 감정을 담는 관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해요. 그래서 <님포매니악>의 남자들은 모두가 어려 보이거나 비겁하거나 헛똑똑이거나 샌님처럼 묘사가 되죠.
 
그런 점에서 <님포매니악>은 거대한 농담과 같은 영화입니다. 저는 조와 셀리그먼의 관계를 의사와 환자의 관계보다 비평가와 창작자, 더 나아가 창작자와 검열관의 관계로 봤어요. 창작자들은 늘 사회가 규정한 한계를 넘어선, 금기시하는 소재를 취해 작품을 만들기를 즐깁니다. 그러면 비평가들은 모두 상징과 은유와 같은 식으로 규정하려고 하죠. 하지만 비평가처럼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는 별로 없어요. 극 중 조처럼 생각나는대로 감정이 따르는대로 작품을 만들죠. (그런 점에서 조가 얘기하는 이야기는 일종의 창작 같기도 합니다. 마치 <유주얼 서스펙트>(1997)의 케빈 스페이시처럼 주변의 사물에서 영감을 얻어 이야기를 해나가죠.) 이에 대해 일부 비평가 혹은 검열관들은 얕은 지식으로 비평을 하거나 아니면 금기시했다고 해서 지금 보신 경우처럼 블러 처리를 하거나 터키 처럼 아예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시켜 버리죠.
 
자꾸 연극 무대와 같은 좁은 틀안에 창작자를 가두려 하는 겁니다. 그와 관련해 조가 멋진 말을 하죠. “금지된 단어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민주주의의 기반은 흔들리는 법이라고요. 언어가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그 사회의 무력함이 입증되는 거예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조가 셀리그먼을 총으로 쏴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 사람이 없어야 조와 같은 탐험가도 계속 탐험을 할 수 있을 거고 창작자들은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충격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거죠. <님포매니악>은 포스터까지 블러 처리가 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극 중 성기를 블러 처리한 것도 참 웃겨요. 섹스하지 않는 성기는 그대로 보여져도 무방하지만 섹스하는 성기는 블러 처리를 해두었습니다. 성기가 오줌만 싸는 신체 기관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창조를 피스톤처럼 밀어붙이는 기관입니다. 아마 그래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그런 비평가 혹은 검열관은 죽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 같죠. 실제로 죽인다는 게 아니라 그런 행위를 없애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님포매니악>은 거대한 농담과 같은 영화가 되는 겁니다.      

시네마톡
(201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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