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자 어쌔신> 비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의 예측 불허 행보는 늘 팬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두 번째 앨범 <태양을 피하는 방법>(2003)으로 단시간에 최고의 한류스타로 등극할 줄은, 박찬욱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로 배우로 데뷔하게 될 줄은, 진정 예상치 못했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매트릭스>(1999)의 앤디와 래리 워쇼스키 형제 감독의 <스피드 레이서>의 주요 배역으로 참여할 줄은 정말정말 몰랐다.

이번엔 비 자신도 놀랐다. 당초 시나리오를 통해 알려진 것보다 <스피드 레이서>에서 비가 연기한 태조의 비중은 높다. “깜짝 놀랐어요. 생각보다 많은 장면에 나온 것도 그렇고 비중이 그렇게 높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어요. 감독님이 저에 대한 애정이 커서 캐릭터를 많이 살려준 것 같아요.” 치열한 레이싱 세계와 이에 얽힌 음모를 담고 있는 <스피드 레이서>에서 비가 맡은 배역은 토고 칸 모터스의 리더 태조다. “음모 해결을 위한 열쇠를 쥐고 있어 신비감이 배어 있는 인물”로 주인공인 스피드(에밀 허시)와 떨어지려고 해도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 한다.

그러나 웬걸, 영화를 보면 스피드와 협력하던 태조가 어느 순간 등을 돌리고 또 갑자기 호감을 보이는 등 변덕스럽게 묘사된다. “저도 궁금해서 감독님에게 물어봤어요. 나중에 알게 될 거래요. 아마 2편도 찍을 것 같아요.” <스피드 레이서> 3부작을 염두에 두고 있는 워쇼스키 형제가 2편에서 태조의 비중을 좀 더 높여 부족했던 묘사를 자세하게 설명할 공산이 크다고 한다. 비는 현재 워쇼스키가 제작하는 차기작 <닌자 어쌔신>의 주연으로 일찌감치 확정돼 베를린에서 몸만들기에 한창이다. 비를 향한 워쇼스키 형제의 애정이 정말 그를 할리우드의 중심으로 이끌게 될까.


기회, 놓치지 않아

<스피드 레이서>는 세상을 바꾸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다. 워쇼스키 형제는 처음부터 그런 존재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데뷔작 <바운드>(1996)의 바이올렛(제니퍼 틸리)과 코키(지나 거손)는 남자들이 판치는 누아르 세계에서 마피아의 돈을 가로채 꿀꿀한 인생을 바꿔보려는 레즈비언 커플이었고, 경천동지할 비주얼 혁명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매트릭스>의 네오(키아누 리브스)는 컴퓨터에 지배당하던 인간을 구원한 영웅이었다. <스피드 레이서>는 스피드의 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궁극적으로 타락한 거대자본에 맞서 레이싱으로 순수한 세계를 지킨다는 내용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는 엔터테이너 비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음악을 아시아 각지에 전파해 한류 붐을 일으켰고 이를 발판 삼아 미국 시장에 진출한 뒤에는 미국 ‘피플’지가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100인’에 선정되었으며, 세계적인 시사주간지 ‘타임’ 온라인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투표에서도 1위를 달리고 있다.

이전에는 꿈꿀 수조차 없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이뤄가고 있는 비는 워쇼스키 형제가 추구하는 세계관에 부합하는 인물로 손색이 없다. 워쇼스키 형제는 태조 캐스팅을 위해 비의 활동이 요약된 테이프를 보자마자 즉시 미팅을 요청했다. 비는 그들을 만난 자리에서 오디션을 보기도 전에 대뜸 이렇게 운을 떼었다. “할 수 있어요. 내 연기가 맘에 들 거예요. 촬영은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죠?” 비의 적극적인 모습에 워쇼스키 형제는 웃음을 터뜨렸고 그걸로 상황 종료. 비의 출연은 결정됐다.

비는 웬만해선 자신에게 들어오는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다. 워쇼스키가 <스피드 레이서>를 위한 오디션을 요청했을 때, 비는 앨범 홍보를 위해 한창 아시아 투어 중이었기 때문에 미국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음 공연까지 연습 시간을 위해 할애된 시간은 고작 이틀, 비는 오디션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워쇼스키의 영화에서 자신이 맡게 될 배역을 다른 누군가가 연기할 생각을 하니 배가 아팠던(?) 그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 비행기 스케줄을 잡고 즉시 미국으로 날아갔다.


목표를 세우고 이루다

출연작은 두 편(<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스피드 레이서>)에 불과하지만, 비는 실제 자신의 모습처럼 꿈꾸는 목표를 기어코 이루고야 마는 인물을 연기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일순은 영군(임수정)의 마음을 얻기 위해 타인의 재능을 훔치는 자신의 특기를 이용한다. 수면비행법을 훔쳐 영군이 정신병원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가 하면 영군의 동정심을 훔쳐 슬픔을 대신 느끼는 등 그녀의 호감을 사는 데 성공한다. <스피드 레이서>의 태조는 일순처럼 순수한 심성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념의 소유자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한다’는 신조를 가진 비에게도 물론 할리우드에서의 목표가 있다. 최고의 배우가 되겠다는 개인적인 목표는 아니다. “전 한국 알림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의 배우를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한국의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어요.” 일본과 중국에 가려 있는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비는 현장에서도 부단하게 노력했다. 예컨대, CG로 구현된 레이싱 장면이 영화의 절반을 차지하는 특성상 배우들은 그린 스크린 앞에 설치된 특수 운전석에 앉아 말 그대로 연기를 해야 했다. 30도를 훌쩍 넘기는 스튜디오 온도에, 두꺼운 슈트까지 입었던 배우들은 10분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기 일쑤였지만 비는 유일하게 30분이 넘도록 자리를 지켰다. “무조건 열심히 했어요.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집념과 끈기가 대단하냐고 놀라더라고요. 저에 대한 호감이 늘어갈수록 한국 배우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한국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어요.”

비의 로비(?)로 극중 이름이 일본인에서 태조로 변경됐다는 항간의 소문과 달리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은 워쇼스키 형제가 조선 왕의 이름이 마음에 든다며 먼저 제안을 해왔다. 감독의 예상 밖 제안에 힘을 얻은 비는 태조 토고 칸을 한글로 넣자고 제안했다. 태조가 입은 슈트와 헬멧에, 사무실 휘장에 새겨진 한글은 <스피드 레이서> 개봉에 맞춰 전세계에 릴리즈(?)된다. “일본과 중국 문화가 아시아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한국 문화가 꿀릴 게 없잖아요. <스피드 레이서>만 보더라도 할리우드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보이지 않나요? 개봉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저와 한국을 알게 될 텐데 생각만 해도 뿌듯해요.”


경계를 넘어

만화를 원작으로 한 <스피드 레이서>를 기획하면서 워쇼스키 형제는 ‘무비 팝(movie pop)’을 만들고 싶었다. 쿨하고 재미있고 기발한 방식을 생각하던 차에 각국을 대표하는 문화의 상징적인(iconic) 요소를 활용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한 것. <스피드 레이서>에는 놀이공원 하늘에 펄럭이는 알록달록한 만국기처럼 다양한 국가의 문화 상징물들이 수놓아져 있다. 홍콩의 밤거리처럼 따닥따닥 늘어선 간판들, 그 위에 새겨진 일본어로 된 상호, 모로코의 사막, 스위스의 알프스 산까지. 그 중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선택된 것이 비다.

자연스러운 영어 연기를 펼치고 쿵푸로 액션을 하는 할리우드 영화 속 ‘rain’의 모습은 예전에 우리가 봐왔던 비 혹은 정지훈이 아니다. “저에게 경계는 없어요. 가수 비, 연기자 정지훈을 구분하기보다 그저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할 거예요.” 비는 처음부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새로운 분야로 나아가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조연이라 아쉽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다. “주, 조연은 개의치 않아요. 연기의 폭이 넓으냐, 그렇지 않느냐가 지금 제겐 더 중요하죠.”

비가 중시하는 건 과정이다. 너무 일찍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가 발끈(?)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가수로 데뷔하자마자 최고 자리에 올랐고 단 두 편으로 할리우드 배우로 불리고 있지만 그건 눈에 보이는 결과일 뿐이다. 데뷔 전 연습생으로 남몰래 눈물지었던 6년의 시간은 소중한 자산이자 버팀목이었다. “어릴 때 상처를 많이 받으면서 인생 공부를 많이 했어요. 노력하지 않고 욕심부터 부리면 무너지게 돼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스피드 레이서>도 그에겐 기초공사였다. 할리우드에서의 첫 영화는 조연이었지만 차기작 <닌자 어쌔신>에서는 당당히 주연이다. 이런 위치가 떳떳한 이유는 그가 한 단계 한 단계 단계를 거쳐 지금의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비에게 최종 목표는 중요하지 않다. 그때그때 눈에 띄는 목표를 달성한다면 그것이 최종 목표다. 비가 올라서게 될 가장 높은 자리가 어딘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FILM2.0 385호
(2008.4.29)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