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긴 변명> 니시카와 미와 감독

니시카와 미와는 영화감독이면서 소설가다. 그에게 영화와 소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영화를 만든 후 부족한 이야기는 소설을 통해 보충하고 반대로 소설을 쓰다 이미지의 한계에 부딪히는 묘사는 영화로 풀어내는 식이다. <아주 긴 변명>은 후자에 속하는 작품이다. 먼저 소설로 쓴 후 각색해 영화로 만들었다.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는 사치오(모토키 마사히로)는 아내 나츠코(후카츠 에리)가 여행 간 사이 젊은 편집자를 집에 불러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다. 이때 텔레비전 뉴스로 들려오는 아내의 사망 소식. 결혼 관계는 유지했지만, 감정적으로는 메말랐던 두 사람의 관계. 사치오는 나츠코의 충격적인 사망 소식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젊은 편집자와 좀 더 육체적인 관계를 이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아내의 죽음에 무감각한 날을 보내던 사치오는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죽은 친구의 남편을 만난다. 그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다. 바쁜 일상 탓에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하자 사치오가 선뜻 나선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아주 긴 변명>에 대한 아이디어를 동일본 3.11 대지진에서 얻었다고 밝힌다. 3.11 대지진은 직접 관련된 이들이나 그렇지 않은 이들 모두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일본의 창작자들에게 이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를 두고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뺏긴 일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남은 자들은 앞으로 어떻게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주 긴 변명>의 한국 개봉(2월 16일)에 앞서 니시카와 미와 감독이 내한했다. 개봉에 맞춰 동명 소설 또한 출간(2월 15일)이 예정되어 있어 여러모로 할 말이 많은 인터뷰였다. 인터뷰는 <아주 긴 변명>의 언론시사회가 있던 2월 1일 저녁 시간에 이뤄졌다.

 

<아주 긴 변명>은 일본에서 영화 이전 먼저 소설로 대중에 선을 보였습니다. 어떤 계기로 소설을 쓰게 되셨나요?
3.11 동일본 대지진이 터졌던 2011년 연말쯤이었어요. 많은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일상을 뺏기게 된 사건이었죠.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인데 굉장히 나쁜 시기에 이별을 하게 되는 사람들. 그럼 남은 사람은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유레루>(2006)를 동명의 소설로 직접 각색하셨죠. <우리 의사 선생님>(2009)에서 미처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 다섯 편을 엮은<어제의 신>이라는 단편집을 내기도 하셨어요. 영화에 못 담은 에피소드를 소설에 반영하신 건데요. <아주 긴 변명>은 소설부터 쓰셨어요. 어떤 이유에서였나요?
<어제의 신> 당시에는 영화를 만들고 나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소설을 다뤘죠. 반대로 소설을 먼저 쓴 다음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나리오 작업을 해야 하죠. 2시간 전후의 상영시간을 염두에 두고 쓰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작업이었어요. 시간의 제약을 두고 써야 할 뿐 아니라 예산까지도 생각해야 했죠. 그러면 쓰고 싶은 것은 많은데 영화를 위해 넣을 수 없는 것들이 생겨요. 그것이 제게는 큰 스트레스이자 딜레마였어요. <아주 긴 변명>은 그에 대한 제약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다하자, 이를 읽는 독자들이 등장인물들 전부를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자, 하면서 소설부터 쓰게 된 거죠.

긴 분량의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각색 작업은 어떤 경험이었나요?
당연히 너무 힘들었죠. (웃음) 실은 소설로 쓸 때부터 영화화가 전제됐기 때문에 오히려 소설을 쓰면서 이거는 영화화할 수 있겠구나 이 장면은 못 찍겠구나, 50% 정도는 예상했어요. 그런 진행 속에 영화로 절대 만들지 못할 설정이나 사연은 소설에서 더욱 깊이 표현했죠. 글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은 영화로 옮겼을 때 과연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습니다.

영화에는 반영하지 않은 소설 속 이야기나 설정 몇 가지를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영화와 소설의 시작이 달라요. 소설은 사치오가 대학 때 사귀었던 연인과의 추억부터 이야기가 시작해요. 과거 부분이라 영화에서는 쓸데없는 정보라고 판단했어요. 영화에 나온 첫 시퀀스, 머리를 깎을 때 사치오와 나츠코가 말다툼을 한 후 안 좋은 채 헤어질 때까지 나누는 대화는 소설과 거의 같아요. 영화에 조금 나오는 부분인데요. 아내의 죽음 이후 사치오의 사연을 다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죠. 조감독 같은 어린 여성이 있어요. 그 스태프의 시선으로 사치오를 바라보는 서술 부분이 소설에 있어요. 그 인물이 영화에는 스크린 구석에 있어 눈에 띄지 않는데 소설에서는 그의 눈에 비친 사치오를 소개함으로써 사람이 변해가고 있구나, 서술하고 있죠.

뺏긴 일상이라고 표현하셨어요. 나츠코의 버스 사고 장면을 직접 묘사하지 않습니다. 사고의 흔적만 보여줄 뿐입니다. 3.11 대지진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고 장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아무래도 부담이 되죠?
단순해요. 예산 때문에 그랬습니다. (웃음) 덧붙이자면, 사고 장면 자체의 비참함과 같은 것은 이 영화의 테마가 아니었어요. <아주 긴 변명>은 어떤 사고를 계기로 해서 남겨진 사람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버스 사고와 같은 직접적인 이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감독님 말씀처럼 <아주 긴 변명>은 아내(들)의 죽음 이후 남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생활력이 떨어지는 남자와 아이들이 바로 그들인데요. 그중에서 특히 남편에 주목합니다. 굉장히 공감 갔던 설정인 게 많은 한국 남자는 주변에 여자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힘들어지거든요. (웃음)
우연히 남자가 주인공일 뿐이지 여자도 이런 상황이면 생활하기 힘들어요. (웃음) 이게 나라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한국과 일본은 남녀 가사 분담이 철저히 이뤄지고 있죠. 전통으로 내려온 문화라 여자가 잘못되면 남편이 힘들어하는 식의 이야기가 영화 속에 담겨 있죠. 아시아라고 해도 한국과 일본과 다르게 대만과 홍콩은 여자가 가사를 하지 않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아주 긴 변명>을 인식하는 접근이 달라요. 홍콩에 프로모션을 갔었어요. 그때 나온 질문 중 하나가 왜 남자를 주인공으로 했냐는 거였어요. 부인이 잘못되면 남자가 비참해지고 그래서 이야기가 드라마틱해진다고 답변을 했죠. 그러자 질문하신 분이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웃음)

<유레루> <우리 의사 선생님> 등 감독님은 남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드세요. 특히 성격이 전혀 다른 두 남자가 부딪히는 과정을 통해 감정선을 구축합니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남자를 충돌시키는 건 유의미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효과적이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말씀하시니까 처음 알았어요. 그런데도 <아주 긴 변명>은 다른 면이 있어요. 말씀하신 충돌이 목적은 아니죠.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정반대되는 사람이 만나서 어떻게 하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 그 과정을 주목하고 싶었어요. 제가 나이가 든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뺏긴 일상으로 삶이 무너져내린다면 어떻게 삶을 이어갈 것인지, 이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관계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관계는 감정을 교류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그래서 감독님의 영화는 배우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는 걸 중요시하고 있죠. 배우들에게 그와 같은 미묘한 연기는 어떻게 주문하시나요?
경우에 따라 너무 달라요. 지문이 한 줄인데도 이를 풍성하게 표현해주는 배우가 있어요. 나츠코를 연기한 후카츠 에리가 그래요. 영화의 첫 장면에서처럼 남편과 그렇게 말다툼을 하고 떠나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죠. 이후 장면을 보면 나츠코가 야간 버스를 타고 친구와 여행을 가는데 아침이 밝아올 때쯤 혼자 눈을 뜨고 창문 밖을 바라봐요. 시나리오에서 이 장면을 표현한 지문을 딱 한 줄이었어요. ‘창문 밖의 흰 눈을 바라보는 옆모습의 나츠코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지문 하나로는 절대 표현되지 않는데 나츠코가 과연 어떤 마음속 갈등을 가지고 있을까 관객들이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하고 싶었어요. 이에 대해 후카츠 에리와 따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고요. 저는 다만 물리적으로 5초 지난 후에 눈 떠세요, 시선을 저쪽으로 향해주세요, 정도만 요청했어요.

사치오를 연기한 모토키 마사히로는 어떤가요?
반면 사치오를 연기한 모토키 마사히로는 궁금한 점이 있으면 다시 말해달라고 하고 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설명해주기를 원해요. 물론 누가 더 낫다의 문제는 아닙니다. 잘 이해가 안 된다고, 어렵다고 하면 아주 철저하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애기를 합니다. 어떤 표현이 어울릴까 대화를 하며 같이 찾아가는 거죠. <아주 긴 변명>의 마지막에 머리 깎는 장면이 한 번 더 나오죠. 머리 깎는 묘사는 모토키 마사히로 배우가 제안했던 거예요. 소설을 보면 부인이 살아있을 때 미용실 가는 게 싫어 사치오가 아내에게 꿍얼거리는 사연이 있어요. 사치오에게는 세상과 연결된 사람이 부인이었는데 부인이 죽음으로써 세상과의 끈이 떨어진 사람이 되는데요. 그러다가 성장을 하면서 결국에는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머리카락을 자르도록 자신의 머리를 맡긴다는 건 세상과의 관계가 다시 연결된다는 의미인 거죠.

머리 깎는 행위는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인데요. 감독님 말씀 외에도 꽤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고통이란 머리가 자라서 깎는 것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는 생각도 들어요. 또한, 남자들이 부인이 없으니까 자기 관리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요. 무엇보다 머리는 혼자서 깎기는 힘든 편인데 그래서 결국 관계가 필요하다는 주제와 이어진다는 인상이죠. 머리 깎는 행위에 특별히 어떤 인상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어떻게 보면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아주 긴 변명>의 소설을 쓰기 전 극 중 인물의 직업 설정을 할 때 남편은 소설가로 잡았죠. 소설가라는 직업은 일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잖아요. 그에 비해 사람의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건 너무 확실하게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고요. 그런 직업적 성격의 반대되는 면을 통해 사치오와 나츠코의 대립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소설가 사치오는 아내의 죽음 이후 역시나 함께 목숨을 잃은 아내 친구의 아이들을 돌보게 되죠. 처음엔 소설가로서 일종의 자료 조사 차원에서 맡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이를 통해 소설까지 완성하게 되는데요. 어떠세요, 창작자의 평상시 생활 태도가 곧 작품의 내용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창작하는 사람이잖아요. 제 안에는 딜레마가 많아요. 이것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이 영화는 제 안에 있는 부끄러움을 보이는 작품이기도 해요. 사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다시 태어난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는 면에 공감하면서 글을 썼어요. 이 작업을 하면서 내가 쓰는 글이, 만드는 영화가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 그런 의심에 일이 잘 안 풀릴 때가 있어요. 쓰고 싶은 걸, 만들고 싶은 걸 찾았을 때, 그리고 완성했을 때 살아서 다행이다, 하는 감정을 느껴요. <아주 긴 변명>은 저에게 스스로 고백하듯 쓴 글이에요.

제목이 ‘아주 긴 변명‘입니다. 20년을 함께 산 부인과 관계가 소원해진 남편이 부인의 죽음 후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는 영화인데요. 제목에 ‘변명‘을 넣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거든요. 일본어로는 좀 다른가요?
일본에서도 ‘변명’은 썩 좋은 의미는 아니에요. 심지어 긴 변명이네요. 얼마나 한심해요. (웃음) 다만, 저에게는 이렇게 뭔가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게 살아가는 이유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쓰고 만든 거예요. 제가 사는 것에 대한 이유 차원에서 변명의 의미를 제목에 담은 거죠.

차기 작품은 영화와 소설을 어떤 순서로 진행할지 궁금한데요.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건 한 번 했으니까 이번 같은 방법은 안 할 거예요. 차기작은 영화로 만들 생각인데요.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하고 싶어요. 관련해 취재를 하고 있어요. 다양한 직업군에 속한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문서로 만들어 작업한 후에 여기에서 하고 싶은 몇 가지 소재를 영화로 만들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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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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