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은 중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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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의 흥행을 이어갈지는 몰랐다. <인터스텔라> 이야기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인터스텔라>는 한국에서 9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 이 기세라면 1천만 관객 돌파는 이제 시간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인터스텔라>가 국내에 첫선을 보인 10월 28일 기자시사회 당일만 하더라도 이 영화에 대해 기자, 평론가들의 반응은 호오로 극명히 갈리는 편이었다. 인류의 새로운 터전을 발견하겠다고 우주로 나간 우리의 주인공들이 웜홀을 통과하고 블랙홀로 들어가 5차원 공간에서 3차원 세계와 만난다는 설정을 두고 한편에서는 우주적인 상상력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지구와 우주를 아우르는 스케일의 한계 때문에 이야기가 산만하고 무엇보다 급작스러운 결말이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이 영화에서 선보이는 우주 관련 이론들은 세계적인 물리학자 킵 손의 검증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이를 감정적인 이야기로 꾸며 관객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가져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경우, 쉽게 설명해, 서로 다른 상대 속도로 움직이게 되면 동일 사건에 대해 시간과 공간이 서로 다르게 측정되는 것을 말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여기에 가족 관계를 대비해 좀 더 쉬운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전략을 취한다.

초등학생 딸 머피(맥켄지 포이)의 만류를 뒤로한 채 우주로 나선 쿠퍼(매튜 매커너히)는 인간이 살 수 있을 만한 유력한 행성 중 한 곳을 방문한다. 다만 이곳에서의 1시간이 지구 시간으로는 7년 정도가 되는, 인류의 시간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아니나 달라, 산처럼 보이는 거대한 파도의 습격에 4시간 정도를 소비하니, 지구 시간으로는 무려 24년이 흐른 뒤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쿠퍼와 머피의 부녀(父女) 관계를 고려할 때 꽤 눈물을 흘리게 하는 설정이다. 그리고 영화는 둘 간의 상대성이론을 영화의 결말까지 끌고 간다. 우주로 떠나기 전 이들 부녀의 집에서 벌어졌던 이상 현상은 실은 5차원에서 쿠퍼가 자신의 우주여행을 막으려 3차원의 지구에 머물던 과거의 머피에게 보낸 신호였다는 설정. 놀란은 이를 이성에서 감정으로 이동하는 이야기의 변곡점 삼아 곧바로 쿠퍼가 자신보다 훨씬 늙은 딸 머피를 재회하는 결말로 가져간다.

이에 대해 <인터스텔라>에 호의적이지 않은 이들은 블랙홀이 무슨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필자 주_ 기계 장치로 갑자기 나타나서 극의 복잡한 내용을 해결하는 신)이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예컨대, 블랙홀의 5차원 세계에 갇힌 쿠퍼가 어떻게 구출되어 머피와 재회한 것인지 그에 대한 설명이 불친절하다는 것이다. 동의할 만한 불만이다.

놀란의 영화는 언젠가부터, 정확히는 <다크나이트>(2008) 이후 극 중 자신이 축조한 세계와 그 관(觀)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뻔한 설정의 영화에 지친 한국 관객들의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꿈속에 들어간다는 설정의 영화는 심심찮게 등장했지만, 꿈속의, 꿈속의, 꿈속까지, 심지어 그 범위를 무의식의 세계까지 확장한 <인셉션>(2010)이 국내에서 큰 성공을 거둔 건 우리 관객들이 놀란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어렵지 않게 추측도록 한다.

<인터스텔라>에 대해 배신감을 느낀 관객들이 느낀 당혹감은 하드 SF로 진행될 것 같은 이성(理性)과 과학 중심의 서사가 가족주의와 결합하면서 뿜어낸 감정의 정서였을 것이다. 나는 이야말로 <인터스텔라>가 국내에서 전작의 흥행 수치를 훌쩍 뛰어넘어 천만 관객에 다가선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잘 알려졌듯이 천만 관객은 전 세대가 움직여야 가능한 수치다. 북미에서는 저조한 흥행성적을 보였던 <인터스텔라>가 유독 한국에서 잘 되는 이유는 12세 관람가인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청소년층부터 중장년층까지 극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인터스텔라>는 흔치 않은 우주 배경 영화에 과학 지식이 접목한 ‘에듀테인먼트’로 주목받으면서 중고등학생들이 극장에 몰렸다. 또한 ‘<인셉션>의 거울 이미지’라는 전문가들의 평이 등장하면서 <인셉션>에 호의적이었던 20~30대 층이 놀란의 신작이라는 사실만으로 <인터스텔라>를 적극적으로 소비했다. 이미지에 민감한 이들 세대는 이왕 볼 거 아이맥스로 제대로 즐기자며 일반 관람료의 두 배 가까운 돈을 아낌없이 지급했다. 여기에 어려운 영화로만 알았던 <인터스텔라>가 실은 부녀간의 사랑을 중심에 둔 감동적인 가족 서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장년층도 심심찮게 극장을 찾았다.
 
흔히 우리가 놀란의 영화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는 가족주의, 천만 관객 등 일반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볼거리가 있되 생각할 거리를 주고 해피엔딩이라고 해도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등 할리우드의 관습을 벗어난 새로운 영화라는 인상이 강했다. 실제로 놀란 감독은 할리우드에서도 제작사의 간섭 없이 자신의 영화 철학과 세계관을 관철하는 몇 안 되는 작가(auteur) 중 한 명이다.  
 
그럼 놀란의 영화 철학과 세계관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가 만든 영화가 전혀 새로운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놀랍도록 획기적인 시도의 영화를 자주 선보였지만, 실은 장르를 창조하기보다는 확장하는 쪽에 가까웠다. <인터스텔라>의 개봉에 맞춰 재개봉한 <메멘토>(2000)는 아내가 살해당한 충격으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범인을 찾는 내용이다.

짧은 줄거리만으로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주인공이 겪는 기억 상실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코자 전체 이야기를 10분 단위로 쪼개 역순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익숙한 내용조차 낯설게 만들었다. <인셉션>도 그렇다. ‘꿈을 해킹한다’는 극 중 설정은 비슷한 방식이나 혹은 변주로 <매트릭스>(1999) <더 셀>(2000)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이터널 선샤인>(2004) <아바타>(2009) 등에서 사용됐다. 다만, 놀란은 은행에서 돈을 훔치듯 꿈속에서 생각을 몰래 가져간다는 데 착안, <오션스> 시리즈 같은 강탈영화로 <인셉션>을 구성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자신의 상상력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기존의 재료에 접목하는 일종의 ‘중도(中道)의 묘’를 발휘하며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각각 흑과 백을 대표하는 배트맨과 조커의 대립을 다룬 <다크나이트>가 전하는바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극단적인 선과 악은 결국 닮은꼴이어서 흑과 백 사이의 균형 있는 조화의 미를 발휘할 줄 알아야 어느 한쪽의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게 <다크나이트>를 통한 놀란의 입장이었다.  

그의 연장 선상에서 <인터스텔라>는 제목의 의미부터 예사롭지 않다. ‘인터스텔라 interstellar’는 항성 간의, 혹은 별과 별 사이를 의미한다. 그에 따라, 영화 역시 ‘인터’, 즉 ‘사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의 주제와 촬영 방식을 꾸민다. 지구에서 우주로 나아가는 이야기답게 영화는 두 세계를 교차하고 이를 좀 더 효과적인 이미지로 각인하기 위해 35mm와 아이맥스 필름을 혼용한다.

개척이 주요 테마인 영화답게 모든 인간이 우주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쪽과 선택된 인간만이 우주로 나가 인류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한다는 측이 맞선다. 이는 한편으로 사랑과 과학의 대립이기도 한데 그래서 영화는 이성 간, 가족 간의 사랑을 강조하는 이야기와 이성에 바탕을 둔 과학 이론이 절묘하게 결합한 형태를 띤다.  

놀라운 건 크리스토퍼 놀란이 대립하고 평행선을 긋는 개념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모두를 아우르는 이야기와 연출로 영화를 가져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놀란 감독이 데뷔작 <미행>(1998)부터 영화적으로 적용한 그만의 상대성이론일 것이다. 심지어 놀란은 불가능한 경우가 아니라면 CG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며 수공업적인 형태로 스펙터클을 만들기를 즐긴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 가족의 옥수수밭을 구현하기 위해 실제로 30만 평의 땅을 매입해 씨를 뿌려 경작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지만, 그는 그전부터 그보다 더한 수공업의 스펙터클을 이뤄낸 적이 있다.

그러니까, 놀란의 영화에는, 무엇보다 <인터스텔라>에는 한국 관객이 영화에 원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우주라는 블록버스터의 볼거리로 일반 대중의 눈을 현혹함과 동시에 과학에 바탕을 둔 이론과 부합한 이야기로 까다롭기로 소문난 Sci-Fi 팬도 사로잡았다. 또한 <인터스텔라>는 극 중 물리학 이론이 최근에 밝혀지고 실제 검증까지 이뤄진 첨단의 영화다. 그와는 반대로 고전 서부극을 연상시키는 지구 내 쿠퍼 가문의 모습은 클래식 영화에 향수를 품은 이들마저 만족하게 했다. 그리고, 대박 흥행에 필수적이랄 수 있는 가족주의마저 껴안은 <인터스텔라>는 결과적으로 천만 관객 영화에 특화된 작품이 되었다.  

ARENA HOMME
201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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