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랠 노자다. 국내 개봉 과정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 Volume1>을 두고 신체 분해 장면이 구체적이고 또한 전체적으로 너무 잔인하다며 12초의 삭제를 가했던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가 DVD 심의에서는 무삭제로 통과시키는 이변
을 연출하였다.
럴수럴수이럴수가! 한 영화를 두고 한달 사이에 같은 심의기관에서 어떻게 이렇게나 다른 평가를 내릴 수가 있을까.
이에 대해 영등위의 수장인 김수용 위원장은, 영화를 심의하는 심의위원과 DVD를 심의하는 심의위원이 다르기 때문에 결과는 다르게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한다. 참으로 무식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는 심의에 대한 일정한 기준이 있기보다는 그 날 참석하는 심의위원의 성향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로서 우린 영등위에 대한 중요한 점 하나를 간파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영등위는 책임 있는 심의기관이 아니라 애들 소꼽장난하듯 그날 모이는 멤버에 따라 지들 꼴리는대로 영화를 심의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영등위는 결과적으로 <킬빌 Volume1>을 영화관에서 본 관객을 ‘두 번 죽이는 꼴’이 되었다. 12초를 삭제함으로써 관객의 볼 권리를 박탈했음으로 한 번, 한 달 후 문제의 12초를 DVD에서는 복원하여 이미 7,000원 내고 영화를 본 관객의 12초 분량에 해당하는 입장료를 갈취(?) 했음으로 두 번.
그러다보니 이와는 반대로 이번 <킬빌 Volume1>의 DVD 무삭제 통과는 영화계를 두 번 살린 셈이 되었다. 일단 이를 통해 책임 없는 영등위의 잘못된 점이 명확히 드러나 이 문제의 기관이 앞으로 나아갈 바에 대한 올바른 방향 제시를 간접적으로 했음으로 한 번, 영등위의 전신인 공연윤리위원회 시절부터 계속된 그동안의 무분별한 가위질 및 심의불허조치로 한국땅을 밟지 못했던 비운의 영화들이 빛을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두 번.
그런 점에 비추어 볼 때 한국에서의 DVD라는 매체는 영상에서의 혁명만을 몰고 온 것이 아니라 가위질과 수입불허로 얼룩진 국내영화시장에 ‘상식’이라는 또 하나의 혁명(?)을 가지고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시 말해 DVD는 국내관객에게 영화에 대한 개안(開眼)의 문을 열어줬는데 이것은 비단 <킬빌 Volume1> 사태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영화시장이 개봉영화에만 편중되어 있고 시네마테크가 활발하지 못한 상황에서 DVD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고전영화를 볼 수 있는 창구를 열어줬으며 또한 <부기나이트>와 같은 작품을 온전하게 볼 수 있는 장까지 마련해주었다.
게다가 <킬빌 Volume1>의 무삭제 출시로 인해 스탠리 큐브릭의 <A Clockwork Orange>나 <샤이닝>과 같은 작품이 조만간 합법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들려오고 있다. 이 정도나 공헌을 했으니 이쯤에서 필자 DVD를 위해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DVD를 국회로!
(2003. 11. 영화 월간지 <DVD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