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소녀>(私が殺した少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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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기를 방해할만한 정보가 담겨 있으니 유의바랍니다.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 시리즈’로 유명한 레이먼드 챈들러가 현대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폴 오스터부터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대가로 인정받는 작가들이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건 이제 너무 유명한 일이 됐다. 영화와 소설할 것 없이 탐정물의 주인공 캐릭터에게서 필립 말로우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일종의 클리셰(Cliché 관습적 표현)로 취급될 정도다. 하라 료도 그런 작가 중 한 명에 속한다. 다만 하라 료만큼 레이먼드 챈들러의 비열한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하면서 그 이상의 ‘뭔가’를 구현한 작가는 본 적이 없다.

하라 료의 소설가로써의 인생 자체가 레이먼드 챈들러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 필립 말로우 시리즈를 읽고는 소설가로 직업을 바꾼 것. 신주쿠에 사무실을 둔 중년의 사립탐정 사와자키를 주인공으로 한 첫 작품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1988)의 첫 문장 ‘가을도 저물어 가는 어느 날, 오전 10시쯤이었다. 모르타르를 칠한 3층짜리 잡거빌딩 뒤편 주차장에는 매년 그렇듯 주위에 나무 한 그루 없는데도 낙엽이 잔뜩 깔려 있었다.’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첫 번째 장편소설 <빅 슬립>의 첫 문장 ‘10월 중순 오전 11시경이었다. 햇빛은 비치지 않았고 선명하게 드러난 산기슭에는 거센 비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를 거의 필사(筆寫)했을 정도고, ‘사와자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안녕 긴 잠이여>(1995)는 제목부터가 벌써 <빅슬립 The Big Sleep>(1939)과 <안녕 내 사랑>(1940)을 조합해 패러디한 경우다.

하라 료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하드보일드한 세계와 특유의 문체를 일본을 배경으로 탈바꿈해 사와자키 시리즈를 완성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안작(贋作), 즉 패러디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흥미롭게도 두 번째 편인 <내가 죽인 소녀>(1989)에는 안작소설가가 등장한다. 안작소설가의 의뢰를 받은 사와자키가 의뢰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딸을 ‘돌려 달라’는 의외의 애원을 듣게 된 것. 영문도 모르는 사와자키는 안작소설가의 딸이자 천재 소녀 바이올리니스트의 유괴 용의자로 경찰에 체포된다. 설상가상으로 진짜 유괴범의 요구에 돈 가방을 전달하는 역할까지 맡지만 불의의 습격에 돈 가방을 잃으면서 사와자키는 사면초가에 놓인다. 

실제로 <내가 죽인 소녀>의 구성은 ‘안작’을 키워드로 흘러간다. 전체적인 구성은 <빅슬립>과 유사하게 가족의 음모와 관련이 있고, 특히 돈 가방을 든 사와자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는 유괴범의 요구에 따라 카페를 전전하는 모습은 <더티 해리>(1971)의 특정장면을 연상시킨다. 경찰 해리 칼라한(클린트 이스트우드)이 소녀를 유괴한 연쇄살인범의 지시에 따라 (역시 돈 가방을 든 채!) 공중전화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장면과 정확히 일치한다. 게다가 사와자키가 소녀의 유괴와 관련해 겪는 일련의 사건이 짜인 각본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지는 대목에 이르면 <내가 죽인 소녀>가 의도한 바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된다.

하라 료는 모방과 창조의 경계에 위치한 안작이라는 행위를 통해 사와자키 탐정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디테일로 활용한다. 사와자키는 이미 탐정사무소를 함께 열었던 동료에게 8년 전 크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어 세상을 믿지 않는다. 그 때문에 경찰에게도 찍혀(?) 동료의 배신을 원죄처럼 안고 살아간다. 사와자키는 고독한 존재다. 웬만해선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경찰에겐 범죄자 취급당하기 일쑤고 일반인에겐 조롱의 대상이다. 그래서 강하다. 강하지 않고서 이 비열한 거리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애초 희망 따위 품지 않고 선과 악 사이에서 박쥐처럼 살아갈 뿐.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에 다름 아니다. 돈을 위해, 출세를 위해, 명예를 위해, 가족의 안위를 위해 선과 악의 살얼음판 위에서 질주하는 우리라고 사와자키와 다를 바 없다.

다만 사와자키의 강함은 불의에 맞서는 정의라기보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방어책이다. 한 발의 총알보다 뼈 있는 농담 한 마디가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힌다는 사실을 그는 본능적으로 체화했다. 이렇게 지진이 발생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시멘트 같은 사와자키에게도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건이 존재한다. <내가 죽인 소녀>가 그렇다. 제목에서처럼 소녀의 시체 앞에서 사와자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사회는 희망이 없다. 아이가 죽어나가는 세상은 절망적이다.

아마 이 지점이야말로 하라 료와 레이먼드 챈들러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일 듯하다. 사실 하드보일드는 시간과 공간에 가장 밀접하게 반응하는 장르다. 시간과 공간은 추리물로써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이고, 당대를 반영하는 문학으로써 시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다.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문체를 염두에 두었다고 해도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타락한 사회라는 사실은 불변하지만 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의 환부는 미국과 일본의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1940년대와 1990년대의 시간 차이만큼이나 천차만별인 것이다. (필립 말로우의 등장 이후 미국의 사립탐정에게 중절모와 트렌치코트가 하나의 도상의 됐듯 사와자키의 영향으로 이후 일본 탐정물의 주인공은 반드시 블루버드를 모는 것이 관습이 된 것처럼!) 레이먼드 챈들러의 세상에서 적어도 아이는 희생자의 목록에 들지 않았다. 하라 료가 하드보일드를 극단까지 밀어붙였다는 평가는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내가 죽인 소녀>는 사와자키 시리즈 중 문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평가를 받을 뿐 아니라 일본 추리소설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다. 그 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올랐고 대중소설가에게 가장 큰 상으로 알려진 ‘나오키상’까지 수상했을 정도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대중문화로 취급받던 추리소설을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렸듯이 하라 료는 챈들러의 세계와 문체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작가로써 안고 있는 정체성을 그대로 극에 대입해 개별적인 작품으로 승화하는 놀라운 문학적 능력을 과시했다. 레이먼드 챈들러를 좋아한다면, 필립 말로우를 최고의 탐정 캐릭터로 꼽는다면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지만 일본 탐정소설의 진가를 확인하고 싶다면, 하드보일드한 세상의 극단을 맛보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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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0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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