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끼리 영화 보면 안 되나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칼럼리스트라는 직업적 특성상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날이 많다. 주로 언론시사회를 이용하는 편이었다. 최근 프로그래머라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된 이후에는 일반시사회를 자주 찾는다. 그러면서 전에는 겪지 못했던 난감한 경험을 하게 됐다. 언론시사회는 기자들이 직업적 의무에서 참석하는 자리라 홀로 영화를 관람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그에 반해 일반시사회는 일반인들의 참여가 월등히 높아 커플끼리 관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으로 언론시사회라면 결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을 일반시사회에서 겪게 되는 것이다.

<러브&드럭스> 일반시사회에 참석한 날이었다. <러브&드럭스>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청춘배우 제이크 질렌할과 앤 해서웨이가 출연하는 로맨스영화다. 선남선녀의 출연에 더해 노출도 불사한 이들의 수위 높은 응응응 장면까지 등장하다보니 극장 안의 공기는 여느 때보다 후끈했다. 여느 때처럼 동행 없이 영화를 보게 됐다. 여자 친구가 없어서 혼자 간 거… 맞긴 한데 같이 볼 사람이 없어 그런 건 아니다, 뭐. 게스트로 참여중인 모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러브&드럭스>를 소개해야 되니 아무래도 혼자 보는 게 영화에 집중하는데 편해서 그랬다, 흠흠.

압도적으로 커플 관객이 많아서 혼자 온 나는 괜히 얼쯤한 기분에 사람들이 잘 안 앉을 것 같은 사각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개의치 않고 영화를 보려던 찰나 잠시간 머뭇거리던 한 커플이 내 눈치를 보더니 옆자리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았다. 난 신경 쓰지 않고, 실은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는데 옆 커플의 속닥속닥 거리는 소리가 귀에 그대로 들려와 꽂혔다. “내가 그냥 오지 말자고 그랬지?” “영화 끝나면 사람들 나가기 전에 곧바로 나가자.” “아, 쪽팔려 죽겠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서로 친구인 듯 한 남자 둘이서 영화를 보러 온 커플이었다. 졸지에 수염이 거뭇거뭇한 수컷 셋이서 영화를, 그것도 노출 난무한 로맨스영화를 함께 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사실 혼자 영화 보는 일이 익숙해서인지 남자끼리 극장을 찾는 상황에도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편이다. <러브&드럭스> 그 날도 내 옆의 남남커플들이 수컷끼리 영화를 관람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수시로 토로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그런데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면, “아~ 저런 건 여자 친구랑 같이 봐야 하는데”, 응응응 장면이 나오면, “너랑 둘이서 이런 영화를 보는 게 창피하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극장에 불이 들어오기도 전에 “야, 빨리 나가자” 도망치듯 극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니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남자끼리 영화를 보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인가, 사람들의 눈을 피할 정도인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여자들은 안 그런데 유독 남자들은 동성끼리 영화를 보는 일에 대해 경기에 가까운 거부감을 드러낸다. 내 주변의 남자들 역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힘겨워 한다. 함께 영화를 볼 여자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한다. 괜한 오해를 받지나 않을까 동성친구와 극장에 가는 일을 꺼리는 것이다. 실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호모포비아의 공포가 읽히는 것이다. 이는 한국남자, 아니 남성 중심적 사고의 인간들에게서 쉬이 목격되는 현상이다. 한국남자에게서 두드러진다면 그만큼 한국사회가 여전히 남성 중심적, 이에 더해 이성 중심적 사고가 팽배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다. TV드라마, 광고 할 것 없이 동성애가 주류 문화의 주요한 소재로 자리 잡은 이때 시대착오적이라고 해도 좋을 동성기피 영화관람 행태는 한국남자의 경직된 사고관의 반영이라 할만하다.

이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굳이 호모포비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문화를 대하는 한국남자의 태도는 그들 스스로의 결정권을 내팽개친 지 오래다. 영화뿐만이 아니라 연극, 뮤지컬, 콘서트 등 대개의 문화공연장은 ‘여탕’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만큼 20~30대 여자들의 독차지가 됐다. 드문드문 발견되는 남자들 역시 적극적으로 문화를 향유한다기보다는 여자 친구에게 이끌려, 아내의 청에 못 이겨 공연장을 찾은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다. 하여 공연문화의 기획은 철저히 20~30대 여자들의 기호와 취향에 맞춰 진행이 되니, 그 안에서 한국남자들의 목소리는 의도적이든, 은연중이든 배제되기 일쑤다. 갈수록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지고 고개 숙인 남자들이 늘어난다고 하는데 단순히 경제권의 문제를 떠나 사회문화적으로 고립되고 있는 남자들의 위상을 반영한다.

흔히들 21세기는 문화가 번창한 나라가 선진국이라는 얘기를 당연하게 쏟아내곤 한다. 한국의 정치인들, 특히 남자 정치인들이 문화의 중요성에 대해 곧잘 언급하곤 하신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좀 더 부드러운 이미지를 조성하기 위한 전략처럼 보이는데 정작 이들과 같은 남자들이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경제다. 이들에겐 문화도 바로 경제다. 돈이 될 때야 비로소 문화인 거지 단순히 즐기고 향유하는 것에 그치면 ‘문화 나부랭이’일 뿐이다. 이들에게는 문화가 일상적으로 즐기는 것이 아닌 특별하게 시간을 내어 감상하는 어떤 것이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책상머리에 앉아 국가의 미래를 고민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이건 어떤 특정 정치인을 겨냥한 발언이 아니다. 그런 이들이 정치를 할 수 있게끔 지지해준 다수 한국인들의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다. 그렇게 문화가 배제된 정책이라는 것은 우리 생활을 좀먹기 마련이다. 예술영화와 고전영화를 상영하는 시네마테크를 지원하는 것보다 4대강사업에 한 푼이라도 더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 중요하고, 축구꿈나무들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축구선진국으로 유학 보내는 것보다 4대강사업에 투입할 삽질 인력을 보충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이며, 제대로 된 피겨스케이트장, 돔 야구장을 건설하기 전 4대강사업부터 마쳐야 국가적인 이득에 더 유리하다는 사고가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의 패러다임이다.

정작 우리 같은 민초들에게 필요한 건 전시목적의 문화건설이 아닌 생활수준 향상으로써의 문화보급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문화의 바람은 낮은 곳에서부터 이뤄지는 것이 정상이다. 문화에 있어서 한국남자들은 상대적으로 여자들에 비해 약자의 위치를 점한다. 그것은 여자들보다 문화적인 안목이 떨어져서도, 지식이 받쳐주지 않아서도 결코 아니다. 문화를 대하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기인한다. 문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도 필요하지 않다. 같이 영화를 볼 친구가 없으면 혼자 극장에 가면 되고 애인이 안 생겼다고 공연장에 가는 걸 꺼려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렇게 조건을 달아 문화를 멀리할수록 여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거리를 잃기 십상이고 그럴수록 정서는 피폐해질 것이며 여자들에게 고립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알량한 권위나 기득권, 특권의식 따위 지나가는 엿장수에게 내다 팔아버릴 필요가 있다. 거대한 대의명분 따위 없어도 문화는 그 자체로 일상이고 생활이다. 문화가 없어도 사는데 하등의 지장은 없지만 무료한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관계의 윤활유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하는데 일조한다. <러브&드럭스>의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극장 안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여자끼리 온 커플들이 제이크 질렌할의 군살 없는 몸매와 탄탄한 엉덩이를 두고 여러 가지 평가의 말들을 꺼내며 자지러지게 웃어댄다. 일면식도 없는 친구들이었지만 먼저 나간 내 옆의 남자커플들이 아쉽게 느껴졌다. 앤 해서웨이의 날씬한 몸매와 하늘을 향해 봉긋 솟은 가슴에 대해 질퍽한 농담을 나눌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쯤 우리 남자들은 애인 없이 친구끼리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아무렇지 않게 느끼게 될까. 그때야말로 우리 남자들이 바로 서는 날일 게다.   일러스트 허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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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NA
2011년 3월호

“남자끼리 영화 보면 안 되나요?”에 대한 2개의 생각

  1. 오랜만에 들르니 취직 소식이! 축하드려요. 홀로 영화 보러 가는 게 어때서요? 커플끼리 데이트 코스로 보러가는 게 더 촌스럽지 않나요, 흥! < 빅뱅이론>의 너드들이 극장 가는 에피소드 보면 완전 부러워할 듯요.^^

    1. 말쓰걸님하 정말 오랜만요 ^^ 예, 작년 11월에 취직했어요. 벌써 세 달이나 지났네요 ^^; 다른 건 모르겠고 밤 새는 게 없어서 그건 제일 좋아요. 근데 제가 가는 곳마다 없어지고 폐간돼서 혹시나 이곳도 잘못되면 어떡하지 괜히 마음 한 곳이 찔리고 그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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