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없는 산>(Treeless M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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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없는 산>의 카메라는 집요하다싶을 정도로 두 아이의 얼굴을 가까이서 찍는다. 그렇게 드러난 아이들의 표정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처럼 모호하기 짝이 없지만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김희연)과 빈(김성희)은 도시에서 생활하던 중 엄마(이수아)를 따라 고모(김미향)를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 남게 된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엄마가 아빠를 찾으러 가겠다며 아이들을 고모 손에 맡긴 것. 아이들은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채우며 엄마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지만 엄마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진과 빈은 고모에게 이끌려 다시 시골의 할머니에게 맡겨진다. 

<나무없는 산>은 여러 모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와 닮았다. 부모가 부재한 아이들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아이의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연기경험이 전무한 비전문배우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감독의 주관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지켜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지켜본다’는 카메라의 행위를 다루는 촬영의 미묘한 차이로 두 영화를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아무도 모른다>가 4명의 아이들로 화면을 꽉 채우는 것에 반해 <나무없는 산>은진의, 빈의 얼굴을 화면 가득 잡아낸다. <아무도 모른다>가 아이들의 행위를 바라봄으로써 카메라가 객관적인 시선으로 기능한다면 <나무없는 산>은 반응을 포착함으로써 아이들의 시선을 대리한다. 그런 까닭에 <나무없는 산>은 종종 고발 시사 프로그램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아무도 모른다>에 비해 다큐멘터리적인 필치가 더 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나무없는 산>의 카메라는 <아무도 모른다>의 카메라에 비해 이 사회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진과 빈의 표정에서는 녹록치 않은 세상사가 빚어낸 어른들의 피곤한 삶이 목격되고 나무 없는 산처럼 헐벗은 세상에서도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감독의 세계관도 엿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들의 얼굴에 밀착한 카메라는 도시, 지방소도시, 시골 순으로 공간이 변화할수록 서서히 배경의 각을 넓혀 가는데 그럴수록 삭막한 도시생활에서 희생당한 아이들의 삶이 초록빛 자연의 기를 받아 회복 가능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나무없는 산>이 결말에서 보여주는 이 같은 시선은 살짝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카메라의 기능과 형식으로 (나는 이 영화처럼 클로즈업으로 일관하는 작품은 본 적이 없다.) 현실의 그늘진 현상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태도는 인정할만하지만 결말에서는 이것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감독에게 주어진 결정권을 미루고 희망이라는 조각배에 이들을 띄워 보내는 듯한 영화적 관성이 느껴진다. 오히려 <아무도 모른다>처럼 아이들끼리 서로 힘을 합쳐 삶을 이끌어가도록 내버려두는 감독의 태도가 더욱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무없는 산>이 이룬 성과를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다. <나무없는 산>은 응시하는 카메라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일례다. 로베르 브레송에서부터 다르덴 형제까지, 이들의 카메라가 그랬던 것처럼 <나무없는 산> 역시 지독한 바라보기로 인간의 죄의식을 자극하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구원을 이야기한다. 이는 감독의 철저한 윤리의식과 이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담보한다. 그런 점에서 <나무없는 산>은 영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감독의 일관적인 시선이 느껴지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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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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