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아사노 타다노부(淺野忠信) 특별전’이 한창이다. 1990년 마츠오카 조지의 <물장구치는 금붕어>로 데뷔한 이래 5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한 아사노 타다노부는 현대 일본영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배우다.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만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는 오시마 나기사(<고하토>). 야마다 요지(<엄마>)와 같은 거장에서부터 구로자와 기요시(<밝은 미래>), 고레에다 히로카즈(<하나>), 아오야마 신지(<새드 베케이션>) 같은 중견의 작가들, 그리고 이시이 가츠히토(<녹차의 맛>)와 같은 신진 감독까지, 90년대 이후 현대 일본영화를 아우르는 거의 유일한 배우다.
그중 이시이 소고 감독의 <꿈의 미로>(1997)는 아사노 타다노부의 표정이 품고 있는 미스터리함을 가장 잘 살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에서 아사노 타다노부가 맡은 역할은 어딘가 모르게 허무한 기운을 내뿜는 버스운전사 니이타카다. 팀을 이룬 버스 차장 도미코(고미네 레나)로부터 친구 치야코의 살인범으로 의심받는 것. 추리소설가 유메노 규사쿠의 <소녀지옥> 중 ‘살인 릴레이’를 각색한 <꿈의 미로>는 도미코의 눈에 비친 니이타카의 모습을 통해 혼란을 겪는 젊은 여성의 심리를 다룬다.
이 영화에서 니이타카는 도미코 속에 내재된 이중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환영에 다름 아니다. 영화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니이타카는 옴므파탈로써 도미코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니이타카를 살인범으로 확신하는 그녀이지만 가까이 접근할수록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드는 그는 현실을 뛰어넘은 존재다. 머리로는 동료를 살해한 살인범이지만 가슴으로는 이 지긋지긋한 버스 차장의 일상을 탈출하게 해줄 남자인 것이다. 니이타카를 인식하는 도미코에게 이성과 감성의 경계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 즉, 도미코가 겪는 혼란은 어떤 경계의 파괴를 의미한다.
파괴는 도미코의 심리적 상황을, 도미코와 니이타카의 관계를 함축하는 <꿈의 미로>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하여 이시이 소고 감독은 상반되는 존재의 충돌을 영화의 주요 이미지로 활용한다. 컬러화면 대신 흑백화면을 선택한 것도 그렇거니와 니이타카는 선과 악 사이를 넘나들고 그를 대하는 도미코의 심리는 한줄기 빛을 따라 어두운 터널을 헤매는 방황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다시 말해 도미코에게 니이타카는 빛과 어둠의 세계를 연결하는 터널과 같다. 니이타카를 벗어나야지만 도미코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도 터널의 중간에서 헤매고 있는 그녀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그런 도미코의 주변을 휘감는 허무와 파괴의 공기는 죽음과 맞닿아 있기에, 그래서 탐미적이다. 사랑은 찰나적이지만 곧바로 사라지기 때문에 허무하다. 마치 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도미코와 니이타카의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영화는 꿈과 현실, 사랑과 죽음이라는 욕망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도미코의 모습을 통해 삶은 허무라는 ‘바니타스'(vanitas)의 테마를 재현한다. 그리고 니이타카는 바로 바니타스의 캐릭터적 재현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했던 캐릭터들의 성격이 대개가 이런 식이었다. 찰나적 아름다움 뒤에 늘 파국의 그림자가 숨어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훌쩍 자살을 택한 남자였고(<환상의 빛>), 아버지의 죽음 이후 돌발적인 살인을 감행했으며(<헬프리스>), 모성애를 자극하는 창백한 얼굴에서 살인의 그림자가 엿보였다(<포커스>).
이시이 소고는 1980년대 일본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장본인으로써 경제 호황을 누리는 일본의 이면에 숨겨진 광기를 영화화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줬다. 살얼음 같은 아름다움 뒤에 균열을 품은 아사노 타다노부는 현대 일본의 얼굴이면서 곧 감독의 미학을 실현해줄 가장 적합한 그릇이었던 셈이다. <꿈의 미로>는 그 어떤 영화보다 아사노 타다노부의 표정에 담긴 사연을 가장 명확하게 규정한 작품일 것이다.

(2009.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