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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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해 숭례문 화재 사건을 보고 놀란 건 그 자체보다 거기에 대응하는 정부의 모습에서였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화재 원인규명과 함께 ‘복원계획이 급선무’라고 밝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복원 계획을 우선적으로 언급하는 그 발상이 실로 놀라웠다.(?) 아~ 위대한 짝퉁 공화국이여.

나는 유홍준의 말 속에서 한국인의 무의식을 보았다. 원본에 대한 무례함과 무지함. 꼭 진품이 아니더라도 껍데기만 그럴싸하게 갖추면 내용물 따위 아랑곳 않는 불굴의 코리안 짝퉁 스피릿. 오리지널리티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한국은 늘 그렇게 역사를 무시했고 가치를 훼손했다. 숭례문이라고 비켜갈 수 있을쏘냐. 국보 1호를 잃은 슬픔도 잠시. 숭례문 화재 사건이 주는 수많은 교훈을 뒤로한 채 2012년이면 우린 전과 똑같은 숭례문을 볼 수 있게 됐다.


2. FILM2.0 매각 협상이 결렬됐다. 벌써 두 번째다. 더 이상 매각에 관심을 보이는 회사가 없다는 점에서 이번 협상 결렬은 FILM2.0의 실질적인 사형선고와 다름없다. 고용승계를 할 수 없다는 게 이유란다. 하지만 속내는 좀 다른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에 매각을 원하는 회사 측 대표와 면담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문화 전반으로 범위를 넓히고 좀 더 가볍고 흥미 위주의 기사를 생산해야 수익을 낼 수 있지 않겠냐며 FILM2.0의 지금과 같은 구성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 전, 처음 매각 의사를 밝힌 회사는 국내 굴지의 일간지였는데 그네들은 2~3년 전부터 꾸준히 FILM2.0에 관심을 보여 왔다. 그럼에도 뜻을 이루지 못한 건 고용승계나 콘텐츠 성격의 유지와 상관없이 FILM2.0 브랜드만을 원한 까닭이다. 내용이 무겁고 너무 깊어 가볍게 가지 않고서는 수익을 내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두 곳 모두 껍데기를 원한 거지 내용물을 원한 게 아니다. 그러니 협상이 결렬될 수밖에.


3. 혹자는 사업, 즉 비즈니스라는 게 그런 거니 이해하라고 한다. 이런 된장! 난 이해도 안 될뿐더러 화도 난다. FILM2.0에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어서? 체불임금을 쉽게 받기가 힘들어져서? 그것도 맞다. 하지만 무엇보다 FILM2.0이 지난 8년 동안 이 바닥에서 쌓아온 역사와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협상 전면에 자리 잡고 있어서 심히 불쾌하다.

FILM2.0은 창간 당시부터 폐간한다는 소문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매체다. 그런 매체가 8년 동안 살아남았다는 건 이 잡지가 담고 있는 내용물이 8년간 인정받았다는 얘기다. (짧았지만) 한때 2만 부 가까운 판매량을 기록할 정도로 호시절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잘 해야 1만부 가까운 판매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부진을 겪고 있지만 판매 감소는 비단 FILM2.0뿐이 아니다. 씨네21도, 무비위크도, 한국의 모든 잡지가 겪고 있는 문제다. 산업의 문제이지 FILM2.0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 그래서 FILM2.0 수익 부재를 콘텐츠 부실 여부로 짚고 넘어가는 건 부당하다. 또한 어불성설이다.

내겐 FILM2.0에게 문화 전반으로 범위를 넓히고 흥미 위주의 기사로 콘텐츠 성격을 바꾸라는 얘기는 무너진 숭례문을 복원하라는 얘기와 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난 몇 달간 계속된 FILM2.0 협상과정 어디에서도 전혀 고려된 바가 없다. 난 FILM2.0 협상 결렬이 한국 특유의 짝퉁 스피릿이 낳은 폐해라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에 대한 인식이 껍데기만으로 판단되는 몽매한 인식에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그것이 사회 전반적으로 퍼진 문화에 대한 인식이라고 생각하니 짝퉁 파시즘이 어른거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FILM2.0의 협상 결렬을 기뻐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2009년 새해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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