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奇談)


사용자 삽입 이미지<천변풍경>(1936)의 박태원은 당시의 경성을 묘사하길, ‘전차도 전차려니와, 웬 자동차며 자전거가 그렇게 쉴 새 없이 뒤를 이어서 달리느냐. 이층, 삼층, 사층 웬 집들이 이리 높고’라며 급변하는 현대화에 놀라움을 감추질 못했다.

반면 ‘경성기담’(2006)의 전봉관은 1940년대 경성을 무대로 ‘두 남녀는 부인의 침실에서 밀회를 즐기다가 마리아에게 발견되었다. 다카하시 부인은 영원한 함구책으로 마리아를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이것을 이노우에와 상의했다’며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사건을 묘사했다. 1930~40년대 경성은 그야말로 이성과 비이성이 교차하는 모순의 시대였다. <기담>은 바로 그 시기의 경성을 무대로 아름답지만 섬뜩한 사랑이야기를 보여준다.

원 시나리오 ‘병원기담’을 토대로 한 <기담>은 ‘1942 경성 공포극’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만큼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은 이 영화의 공포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1942년은 일본의 제국주의가 막바지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바다 건너 신문물의 유입이 한창이던 시대였다. 그 중심 경성에서는 낮이 되면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의 향락이, 밤에는 비명이 난무하는 살육이 거리를 지배했다.

정가형제 감독은 이 시대를 살려내는 방식으로 하얀 소복 입은 귀신과 원혼의 귀기 서린 복수 따위를(?) 보여주는 데 러닝타임을 허비하지 않는다. 대신 신구이념이 충돌하는 이중의 시대를 통해 모순된 공포를 자아낸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과 행복을 만끽하는 주인공의 생명력 넘치는 감정 뒤에서 썩은 곰팡이처럼 삶을 좀먹는 죽음의 그림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병원장 딸과의 결혼을 앞두고 주변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정남이지만 어쩐 일인지 아리따운 여고생 시체에 마음을 빼앗겨 정신을 홀리고, 멋쟁이 새 아빠가 생겨 환희에 들뜬 아사코의 기쁨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와 동시에 악몽으로 급전직하하며, 동원과 인영은 예정된 파멸 앞에서 시한부 사랑을 나눌 뿐이다.

사랑도 넘어서지 못한 시대의 이중성. 아름다운 시기에 닥친 슬픔을 공포로 승화하는 <기담>은 묘사의 극적 대비를 통해 말 그대로 색깔 있는 공포를 선사한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붉은 장미잎이나 하얀 눈밭 위에 흩뿌려진 핏방울, 또는 다다미방에서 상징적으로 펼쳐지는 사계절처럼 아름답지만 끔찍한 느낌을 강조한다. 이처럼 직접적인 공포보다 철저히 형식미에 입각한 공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담>은 독특하다. 게다가 표현을 과장하지 않고 절제하다보니 무섭기보다는 안타깝다. 사랑과 죽음이 뒤엉킨 순간에 발생하는 비극에 초점을 맞춘 까닭이다. 물리적인 공포보다 심리적인 공포에 주력하는 <기담>은 무서움을 유발하는 장치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전단계의 장면에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켜켜이 쌓아가며 사랑에서 공포로, 외부세계에서 내부세계로 이동하는 것. 정남이 이승과 저승의 심리적 경계에서 혼을 빼앗기는 것도, 아사코가 밤이면 죄의식에 못 이겨 늘 가위에 눌리는 것도, 인영이 과거를 잊지 못해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것도 모두 이에 따른 것이다.

‘안생병원’이라는 공간은 이런 등장인물들의 혼란한 심리상태를 상징화한다. 하여 공포의 원인이 되는 장소도, 마무리되는 장소도 병원이다. 사건 대부분은 안생병원에서 이뤄지며 제작진이 가장 공을 들인 곳도 안생병원의 세트다. 양수리 종합촬영소의 세트장을 중심으로 그 외의 공간이 들어선 별도 세트장까지 합쳐 무려 1,300평 규모의 병원 세트를 마련했다. 또한 실제 동선을 계산하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1942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단, 혼란스러운 시대상과 인물의 이중적 심리를 반영하기 위해 건축양식에 있어서는 서양식과 일본식을 적절히 혼합했다. 정남이 여고생 시체에 남모를 감정을 느끼는 시체안치소 세트의 경우, 숭고한 사랑임을 강조하기 위해 유럽풍의 아치형 구조를 끌어들여 종교적인 느낌을 살렸다. 차가운 느낌의 하얀 타일을 깔아 음산한 분위기도 자아냈다. 하지만 전체적인 병원의 내부 모양새에 있어서는 한정된 공간이 주는 폐쇄감과 원색 위주의 인테리어가 풍기는 자폐적인 분위기를 접목, 인간 심리의 구체화를 꾀했다.

<기담>은 이야기에서부터 공간까지 시대가 품고 있는 이중성을 구현하려 애쓴다. 그래서 영화는 구구절절한 대사보다 단 한 컷의 이미지에, 익숙한 클리셰 대신 기묘한 상징에, 복잡한 플롯보다 강렬한 스타일에 이끌린다. 그 때문에 썩 친절한 영화는 아니다. 관객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둔 탓도 있지만 98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1979년과 1942년, 1942년 속에(?) 3개의 에피소드 등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등장한 공포영화 중에서나 그간의 공포영화들 속에서 차별화되는 지점에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경성을 트렌드로 한 작품 중 첫 스크린 개봉작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기담>은 1942년이라는 모순된 시대를 끌어들여 신구좌우의 이념이 충돌하는 작금의 대립양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공포영화가 단순히 공포를 유발하는 장르만은 아니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드디어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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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46호
(2007.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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