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사랑>(Incen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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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은 여러 매체를 통해 캐나다 영화라고 소개가 됐지만 더 정확하게는 퀘벡 영화다. 영어가 아니라 불어로 대화가 이뤄지고 여기에 아랍어가 중간 중간 끼어든다. 언어로 촉발된 혼돈은 종종 바벨탑 신화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그을린 사랑>은 현대판 바벨탑 신화라고 할만하다. 언어가 아닌 지금 아랍(레바논 내전이라고 추정된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격한 종교 충돌 및 그에 따른 복수의 혼돈이 야기한 비극적 가족사가 펼쳐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고발하는 전쟁의 참혹함은 전장을 배경으로 삼지 않는다. 메마른 아랍의 사막, 아니 혹독한 폭력이 휩쓸고 간 죽음의 대지에서 <그을린 사랑>은 출발한다. 라디오 헤드의 <You And Whose Army?>(영국의 이라크 파병 이후 톰 요크가 토니 블레어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곡으로 유명하다.)가 흐르면서 전쟁 병기로 길러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비추며 오프닝을 여는 <그을린 사랑>은,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를 추적해 들어가는 영화(로 보인)다. 안 그래도 오프닝이 끝나면 주인공 남매가 공증인을 통해 어머니의 유언이 담긴 편지를 전해 받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편지를 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남매에게는 지금껏 비밀에 부쳐둔 아랍에 남겨진 또 하나의 아들을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평생을 자식을 돌보는데 무관심했다고 생각한 아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반면 딸은 어머니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라며 이를 받아들인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언제나 남성들은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적대감을 취한다.)

여기서부터 <그을린 사랑>은 오빠를 찾아 레바논으로 떠나는 딸의 여정과 엄마의 과거를 교차하며 이들 가족사에 숨겨진 전쟁의 상흔을 쫓는 형식을 취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태생적으로 미스터리의 구조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관객의 관심을 끌기위한 궁여지책의 오락적인 목적이 아닌 나도 모르는 새 몸속에, 핏속에, DNA속에 스며든 전쟁의 흔적을 끌어내기 위한 구조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오프닝에서 비친 아이들이 그 자신의 의지로 어린 나이에 군인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럼으로써 사랑보다 증오를, 소통보다는 폭력을, 결국 화해가 아닌 전쟁을 접하면서 성장하고 이것이 다음 세대에도 그대로 되풀이될 거라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의 시대, 전쟁 통인 세상에서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일이고 숭고한 일인 것이다.

<그을린 사랑>에 ‘위대한’이라는 수사를 붙일 수 있다면, 주인공 남매의 어머니가 전쟁 와중에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치고 결국엔 화해의 전도사로서 역할을 다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개의 전쟁영화들은 ‘고발’의 형태로 전쟁의 참상을 드러냄으로써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을린 사랑>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금 이 세상의 평화는 화해가 우선돼야 한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결국 아랍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아들과 캐나다 퀘벡의 남매가 조우하는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인류는 종교, 인종, 나라 등 모든 것을 초월해 인간이라는 한 핏줄로 엮어있음을, 그래서 이제는 우리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자는 것을 절실하게 역설한다. (결국 극중 남매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는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남긴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캐나다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면서 전쟁이 야기한 비극을 정면에서 다뤘다는 것, 그만큼 전쟁의 피해가 전 세계적으로 폭넓게 퍼지고 있음을 웅변한다. 그래서 <그을린 사랑>에 대해 ‘미래의 고전으로 자리 잡을 문제적 걸작’이라는 표현은 그리 과장돼 보이지 않는다. 영화를 감독한 드니 빌뇌브는 앞으로 기억해야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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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10.25)


4 thoughts on “<그을린 사랑>(Incendies)”

  1.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무서운 영화였어요. 비극중에서도 격하게 비극적인 오이디푸스를 차용한 것도.. 역사는 여성의 몸에 새겨진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흠… 극장 들어갈땐 맑더니 비오네요 ㅠㅜ

    1. 전 남자인 게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남자들의 폭력이 여성을 향할 때 그런데요, 아마 가장 큰 형태가 전쟁으로 보여요. 전쟁에는 남성들이 여성에게 가하는 모든 폭력의 종류가 다 들어있죠. 남자들은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 정말 죄의식을 느껴야 해요. 근데 너무 뻔뻔해서 탈이죠.

    2. 학생때 그나마 좋아했던 비평론 수업중에 이런 얘기가 있었어요. 역사의 상흔은 3번의 세대를 지나야 지워진다. 위의 글에 쓰신 DNA이야기죠. 다만 그 유전자를 실어나르고 잉태하는게 여성이라는 것이 아픈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저 수동적인 피해자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특정 ‘성’이 아니라 그저 잘못 형성된 인간의 본성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어쨌든 여성을 약한 존재로만 그리지 않아서 저는 좋았어요^^ 더군다나 아저씨처럼 올바른 사고방식의 남성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3. 디케님은 수업을 굉장히 열심히 들었던 학생이었군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 농담이고요, 너무 좋은 내용을 적어주셔서, 기억하고 있다가 다음에 관련한 글 쓸 기회가 있으면 꼭! 인용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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