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몰락은 파열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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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영화계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아메리칸 뉴 시네마’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1975), 조지 루카스의 <스타 워즈 에피소드4-새로운 희망>(1977) 등을 앞세운 블록버스터 영화에 주도권을 넘겨주며 권불십년(1960년대 말~1970년대 말) 했다. 2012 시네바캉스 서울의 섹션3에 마련된 ‘파열의 이미지’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 몰락한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여진처럼 남아 컬트의 지위를 획득한 7편의 영화를 살핀다.

<분노의 악령 The Fury>(1978)은 ‘파열’의 징후를 온 몸(?)으로 체화하는 영화다. 정보국에서 은퇴한 피터(커크 더글라스)는 아들과 휴가를 즐기던 중, 괴한의 습격을 받는다. 초능력을 가진 피터의 아들을 납치하기 위해 정보국의 벤(존 카사베츠)이 꾸민 짓. 도주하던 피터는 또 다른 능력을 가진 소녀 헤스터(캐리 스노드그래스)를 만나 아들을 구하러 나선다.

<분노의 악령>은 장르 자체가 파열의 양상을 보인다. 정보국에 쫓기는 피터의 사연이 ‘첩보물’의 성격을 띠는 동시에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이들이 등장하는 ‘오컬트’가 충돌하는 것이다. 이 같은 장르의 혼합은 전례 없는 시도지만 단순히 브라이언 드 팔마의 장르적 상상력으로만 설명 가능한 결과물은 아니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초능력 부대를 양성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다. (<초민망한 능력자들>이 증명하지 않는가.) 초능력자를 앞세워 세계 정복의 야욕을 드러내는 벤의 설정이 그렇게 허무맹랑한 것은 아닌 셈이다.  

미국의 지배력을 지탱하는 건 불법적인 감시와 통제다. 타인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고 그럼으로써 불안을 겪는 미국인들의 정신은 분열될 수밖에 없다. 추격전의 양상을 띠던 영화가 오컬트로 변모하는 건 그런 미국인의 증상을 장르적으로 대입한 결과다. 하지만 그것이 벤과 같은 기성세대에만 해당하는 것일까. <분노의 악령>에서 남다른 능력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은 피터의 아들이나 헤스터와 같은 청소년들이다. 이들을 이 지경으로 몰아붙인 건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헤스터의 분노가 벤에게로 향하는 건 당연한 결과다.

<이블 데드 The Evil Dead>(1981)는 공포물이라는 점에서 <분노의 악령>과 장르적으로 다르지만 젊은 세대의 정신 분열을 은유한다는 점에서 주제를 공유한다. 깊은 산 속 외진 별장으로 놀러간 다섯 명의 젊은 남녀가 죽음의 책에 갇혀있던 악마를 부르게 된다. 봉인이 해제된 악마는 이들을 공격하고 우리의 주인공들은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샘 레이미는 특정장르에 천착하는 감독이 아니다. 필모그래프를 살펴보면 꽤 다양한 장르를 경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에게 ‘공포영화의 장인’이란 타이틀이 어울리는 이유는 공포를 조장하는 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까닭이다. 샘 레이미에게 공포영화는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에 스며든 고통의 장르적 발현이다.

사실 <이블 데드>는 <이블 데드2>(1987)와 엮일 때 정치적 함의가 두드러진다. <이블 데드>에서 나약했던 애쉬(브루스 캠벨)가 시리즈가 더할수록 과감해지는 설정은 미국 젊은 세대의 불안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이블 데드>에서 죽어가는 친구의 도움 요청에도 겁에 질려 소극적이었던 애쉬는 <이블 데드2>에 이르러 ‘람보’와 같은 전사로 부활한다. 애쉬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가 고립된 채 공격당한다는 설정은 당시 레이건 정부의 냉전이라는 기성세대의 원죄다. 하지만 <분노의 악령>의 벤이 원했던 바처럼 애쉬가 전사로 거듭남으로써 정신 분열을 통한 세대의 구별은 더 이상 무의미해진다.

그에 따라 선과 악의 경계는 불분명해졌다. 이는 아메리칸 뉴 시네마가 일찍이 축적해놓은 영화적 유산이다. 그런데 이제는 대 놓고 <도둑 Thief>(1981)이다. 프랭크(제임스 칸)는 낮에는 카센터 사장이지만 밤에는 프로페셔널 도둑이다. 그는 큰 건수를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한적하게 미래를 나누고픈 계획뿐이다. 허나 도둑에게 어디 낭만이란 것이 허용되는 시대던가.

<도둑>에는 마이클 만이 지금껏 고수해온 도시와 범죄의 상관관계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 당시에도 거리에는 탐욕이 넘쳤고 그 속에서 휘둘리는 주인공의 비극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여 마이클 만의 영화는 필연적으로 풀숏의 미학을 추구한다. 카메라가 프랭크에 초점을 맞춰도 그 뒤의 점점이 박힌 불빛들이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예정된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다.  

거리의 영화라는 점에서 마이클 만은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직속 후계자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기수들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온 건 세트만으로 더 이상 미국의 검은 현실을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만의 범죄를 향한 영화적 탐구는 변함이 없지만 더욱 사실적인 촬영을 통해 진화하는 건 도시의 악이 그만큼 악랄하게 세포 분열한 탓이다. 그러니 프랭크 같은 일개 범죄자에게 모든 책임을 넘길 수 있을까. 도둑임에도 거부감이 들기는커녕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는 건 이 때문이다.  
 
마이클 만의 또 하나의 작품 <맨헌터 Manhunter>(1986)에 이르면 범죄자나 이를 쫓는 경찰관은 짝패가 된다. FBI 수사관 윌 그래험(윌리엄 피터슨)은 렉터 박사(그렇다. 이 영화는 토마스 해리스의 <레드 드래곤>을 영화화했다!) 검거 후 정신적 스트레스로 반 은퇴 상태에 있다. 가족과 함께 해안가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해결이 어려운 연쇄 살인 소식을 듣고 어렵게 업무 복귀를 결정한다.

윌은 (윌리엄 피터슨이 연기한) <CSI 과학수사대>의 길 그리섬처럼 침착하고 냉정한 면모를 과시하지만 수사 방법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살인범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가해자의 입장에서 범행을 역으로 추적해가는 것. <맨헌터>는 이를 형식으로 치환한다. 연쇄살인범의 시점에서 범행이 이뤄지는 오프닝에 이어 윌의 시점에서 범행 장면을 반복하는 것이다. 더욱이 윌을 중심에 놓고 흐르던 영화는 절반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살인범의 정체를 밝힌 후 그의 사연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진행한다.

연쇄살인범의 이상심리를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윌이 혼란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도움을 청하겠다며 찾아간 렉터마저 보복심으로 윌을 위기에 빠뜨리니, <맨헌터>의 주요한 이미지 콘셉트는 ‘고립’이다. 앞뒤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범죄에, 이에서 벗어나고자 선택한 휴식조차 용납하지 않는 FBI의 부름에, 과연 윌에게 도움을 줄 이는 누구인가.

<괴물 The Thing>(1982)은 <맨헌터>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되어줄만한 영화다. 남극 대륙에 외계생물체가 떨어지면서 연구소 직원들은 혼란에 빠진다. 이 생물체는 살아있는 것이라면 죄다 흡수, 복제하는 능력으로 무기로 삼는다. 직원들은 누가 동료이고, 외계생물체인지 알 도리가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이 생물체가 직원의 몸을 빌려 남극을 벗어날 경우, 인류 멸망이 초읽기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존 카펜터는 <괴물>에서 미국인들이 갖는 외부의 공격에 대한 공포와 다른 것에 대한 공포를 총체적으로 조망한다. 레이건 시대가 그랬다. 외부적으로는 구(舊)소련의 핵위협에, 내부적으로는 남자, 백인, 이성애자, 청교도인을 제외한 소수자들이 미국의 주류사회를 위협하는 잠재적인 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니까 <괴물>의 직원들이 서로를 의심하는 설정은 당시 미국인들의 느끼는 공포의 대상이 굉장히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외계생물체의 공격에 끝까지 살아남은 이가 ‘백인’ 맥레디(커트 러셀)와 ‘흑인’ 놀스(T.K. 카터)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외계생물체가 제거됐음에도 서로에게 의심의 총부리를 겨눠 고립을 자처하는 마지막은 공포가 불신으로 전이되는 미국의 현실을 은유한다. <괴물>이란 해답의 질문 격인 <맨헌터>를 비롯, 앞서 설명한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미국의 정신적 파열은 불신으로 출발해 불신으로 귀결된 필연적 운명 같은 ‘것'(The Thing)이다.

<비디오드롬 Videodrome>(1983)이 정치적인 내용을 다루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읽히는 건 TV를 도피처 삼아 치부를 외면하고자하는 미국인의 강박을 다루기 때문이다. 맥스(제임스 우즈)는 소프트 포르노를 주로 방영하는 채널의 대표다. 그가 후원하는 해적방송의 직원을 찾아간 맥스는 고문과 살인을 실제로 다루는 스너프 필름을 보고는 매혹 당한다. 그 후 현실과 TV 속 현실을 혼동하게 된 맥스는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비디오드롬>이 묘사하는 TV는 시청자들을 환각에 빠뜨리는 시각적 마약이면서 그들의 감각을 조작하는 가상현실이다. 현실을 잊기 위해 사람들은 브라운관 앞으로 몰려들고 TV는 이들을 붙들어 매기 위해 경쟁적으로 더 자극적인 영상을 쏟아낸다. 불법적 감시가 지배의 헤게모니가 된 미국은 TV라는 합법적인(?) 통제 수단을 얻게 된 셈.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TV로 방영되는 폭력과 그 폭력이 정치 통제의 수단으로 인간 육체에 침투해가는 과정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다.

맥스의 역설은 채널을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선택 당함으로써 ‘빅브라더’의 노예가 된다는 점에 있다. 크로넨버그는 이 과정을 육체가 변이하는 기이한 이미지로 펼쳐 보이며 TV가 그렇듯 시각을 현혹하는 방식을 택한다. 비평가 로빈 우드는 “인간의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혐오감”이라 표현하면서 ‘정치적인 반동’이라고 평가했다. 인간의 혼란을 기계와 육체의 결합으로 접근한 크로넨버그인 것을 감안하면 수긍할만한 비평인 것이다.   

<악마의 키스 The Hunger>(1983)는 탐미적인 이미지에의 집착이 돋보인다. 왜 아니겠는가. 뱀파이어의 불멸에 대한 의지가 성적으로 해석되는 텍스트에서 감각적인 이미지는 필수다. 그것은 곧 살아있다는 감각의 확인과도 같다. <악마의 키스>는 그렇게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살아있음을 역설적으로 감각한다.

뱀파이어 존(데이빗 보위)은 인간의 피를 마셔도 점점 수명을 다해간다. 동료 미리암(카트린 드뇌브)이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한 걸 감안하면 상대적인 박탈감이 클 법도 하다. 존은 영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의사 새라(수잔 서랜든)를 TV를 통해 접하고는 그녀를 찾아가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는다. 하지만 새라는 그의 의견을 묵살하고 존은 자취를 감춘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새라는 존을 찾아가지만 미리암이 그녀를 맞이한다.

<악마의 키스>는 존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미리암과 새라의 관계가 더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태생적으로 뱀파이어는 반(反)영웅의 존재다. 토니 스콧은 이를 비틀어 여자 뱀파이어의 이야기로 꾸민다. 남자라는 기득권의 부정이 전제되는 것인데 미리암과 새라 사이의 관계의 역전도 이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의사가 직업인 새라는 기득권적 존재다. 소수자인 미리암에 비해 우위를 점하는 위치에 선다. 하지만 뱀파이어가 된 새라는 미리암에게 피를 갈구하는 위치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처럼 <악마의 키스>가 보여주는 남녀, 그리고 기득권과 비기득권 사이의 관계의 역전은 선악의 기준을 흔들었던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유산이 어떤 식으로 계승되고 발전되는지를 결정적으로 예시한다.      
 

월간 cinematheque
여름 합본호

“그리고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몰락은 파열의 이미지를 창조했다”에 대한 2개의 생각

    1. 그래서 시네바캉스죠 ^^ 근데 어제 보니 < 맨헌터>는 필름 수급이 안되서 < 사냥꾼의 밤>으로 대체되었다고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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