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세상 모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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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노골(?)적으로 나타내듯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아버지의 성장담입니다. 자기 자식 잘되는 것만 바라는 아버지에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품게 되는 더 큰 아버지로의 성장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죠. 사실 극 중 젊은 아버지인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는 썩 나쁜 부모가 아니에요. 그 자신이 성공한 비즈니스맨이듯 하나뿐인 아이가 매사에 똑부러질 수 있도록 엄격하게 교육하는 한편으로 다정한 면모를 보여주거든요. 그런데 분신처럼 키운 아들이 자기 자식이 아니라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요?

사랑하는 아내가 자식을 낳았던 병원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알고 보니 아이가 뒤바뀌었다고 하네요. 그러니 원 부모에게 지금 키우는 아이를 돌려주고 생판 본 적도 없던 자식을 데려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게 어디 쉽겠어요? 게다가 형제들과 부대껴 살아왔던 탓인지 6년 만에 조우하게 된 실제 자식은 형, 동생이 없는 료타 집에서의 생활에 영 적응을 못합니다. 료타는 도대체가 이 아이에게 어떻게 정을 붙이고, 무엇보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료타가 갖는 혼란은 뒤바뀐 자식에 대한 생소한 감정이 일차적인 원인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것입니다. 그 전까지 함께 했던 자식은 자신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생각해서 애착이 갔는데 지금 이 아이는 전혀 그렇지가 않아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혹시 자식이라는 개념을 좁은 의미의 가족이라는 개념에서, 그러니까 자신과 닮은 부분이 있어야 인정하게 되는 이기주의 차원의 문제는 아닐까요? 한국의 경우라면 핏줄 문제로 치환할 수 있겠군요.

관련해 흥미로웠던 장면은 아이가 바뀐 사실을 접하고, 또한 그것이 병원 측의 실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료타 부부와 뒤바뀐 아이를 키웠던 또 한 쌍의 부부가 공히 아주 침착하더라는 겁니다. 분노하는 장면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한국의 부모였다면 병원 측을 상대로 멱살잡이로 모자라 아주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텐데 말이죠. 이건 한일 국민성의 차이일수도 있겠지만 저야 일본의 민족적 성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 뭐라 설명할 수는 없는 입장이죠. 다만 이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영문 원제는 ‘Like Father, Like Son’, 좀 거칠게 번역하자면 ‘아버지처럼, 자식처럼’ 정도가 되겠죠. 료타와 다르게 상대방 부부, 특히 아버지 쪽은 원래 아이를 데려오고도 크게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워낙 아이들이 많은 집안이라 그런지 료타 부부가 6년 동안 키워왔던 아이는 부모가 바뀌었는데도 더 잘 지내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료타가 찾아와도 찡한 감정 같은 걸 드러내지도 않고요. 개인적으로는 이 차이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주제로 수렴되는 듯 보였습니다.

료타는 자신의 욕심을 가지고 아이를 키웁니다. 료타처럼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아버지 자신을, 더 나아가 료타 가문이 빛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에 반해 상대방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바라는 바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저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아이들이 서로 살을 맞대고 사이좋게 살아가면 그 정도에 만족하는 것이죠. 그는 특정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아이들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의 가족에만 한정하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될 것을 료타에게 알려줍니다. 료타뿐이겠습니까. 이 영화가 한국에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이 사회의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만 잘되라고 아등바등 경쟁하는 가족 이기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예상한 것보다도 더 뛰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올해 칸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이었던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영화에 극찬을 표하며 최고상을 수여했죠. 가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얼추 통하는 게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보여주는 가족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필버그의 가족주의는 흔들리는 미국 사회를 단합하게 만드는 보수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그와 다르게 히로카즈의 가족주의는 모든 아이들에게 ‘아버지처럼’, 모든 아이들을 ‘자식처럼’, 즉 일본을 넘어 전 세계를 소통케 하는 보다 보편적인 메시지가 기저에 흐릅니다. 스필버그는 절대 따라할 수 없는 경지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나아간 거죠. 그렇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거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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