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의 이방인> 김명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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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가 있기 전 야구팬들은 전국의 고등학교 야구팀이 총출동한 봉황대기에 열광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을 기념해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봉황대기 결승전은 ‘역전의 명수’로 유명한 군산상고와 일본에 적을 두고 있는 재일동포 팀이 맞붙었다. 한국인들의 일방적인 응원 속에 군산상고가 우승했고 재일동포 팀은 환영받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30년을 훌쩍 넘긴 지금 당시 재일동포 팀의 멤버들은 어떻게 지낼까? 김명준 감독(사진 가운데)은 당시의 멤버를 찾아 잠실야구장 마운드에서 시구를 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우리가 그동안 외면했던 이들과 누락된 역사를 한국의 마운드에 되살리기 위한 화해의 손길이었던 셈이다. 그 과정을 다룬 것이 바로 <그라운드의 이방인>이다. 재일조선인학교를 다룬 <우리 학교>(2006) 이후 9년 만에 발표하는 신작에 대한 우여곡절(?)의 사연을 김명준 감독에게서 들었다.
 
이 영화를 처음 기획한 건 조은성 프로듀서였다고요?
재일동포 야구단의 숨겨진 얘기를 다룬 블로그가 있어요. 그중 일본에서 20년 동안 야구팀을 지도한 재일동포 감독의 이야기를 읽고 조은성 프로듀서가 감동하여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어요. 인디스토리 대표님과 의기투합해서 프로젝트 얘기를 하다가 ‘재일동포’의 사연이라는 점에서 <우리 학교>를 찍었던 저를 불렀던 거죠. 제게 상담을 부탁한 건데 연출 이야기까지 나왔어요.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제가 야구를 잘 몰라요.

<그라운드의 이방인>이 야구를 매개로 하지만, 결국 재일동포 이야기잖아요. 야구를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우리 학교>는 총련계 동포 이야기란 말예요. 근데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민단 쪽이잖아요. 민단 쪽의 분위기를 알고 있거든요. 우리말이 잘 안되고 일본 사회에서도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아요. 총련 쪽보다는 네트워크가 깊게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어려운 작업이 될 거라고 지레짐작한 거죠.

결국 ‘총대’를 메셨어요? (웃음)
책임감이 느껴지더라고요. 두려움이 앞섰지만, 재일동포 사회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아는 세계는 재일동포 사회 안에서도 일부이니까 좀 더 알아볼 수 있겠다, 배우겠다는 각오로 시작했죠.

하지만 애초 조은성 프로듀서가 기획했던 이야기와는 많이 달라졌죠?
20년 동안 감독하셨던 분의 개인사를 통해서 좀 더 넓은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촬영을 고사하신 거예요. 나이도 지긋하시고 살날도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일본 사회에 재일동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자식과 손자들에게 누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영화를 찍던 중간에 지금의 이야기로 전환하게 됐어요.  

1982년 봉황대기 결승전에 출전했던 재일동포 멤버들이 중심에 놓이지만, 굴곡 많았던 한국의 현대사가 함축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한국의 주류 스포츠는 축구와 야구로 양분되어 있잖아요. 원로 재일동포 야구인들이 얘기하기를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야구는 남한, 축구는 북한이라는 인식이 강했대요. 축구는 일제 강점기부터 국민 스포츠이긴 했지만, 북한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에 올랐던 만큼 큰 성적을 거뒀으니까요. 그래서 재일동포 사회 내에서 총련계는 축구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대신 당시 북한에서 야구는 불모지였으니까 야구를 하고 싶은 동포들은 조국으로 와야 한다면 남한이었죠. 1956년부터 재일동포 야구단이 한국의 고교야구 대회에 참가한 이후부터 이들이 알게 모르게 많이 왔던 거죠. 당시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심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안고 들어가야 하는 숙명 같은 게 있었던 거죠.  

영화는 ‘Batter box-1st Base-2nd Base-3rd Base-Batter Box’로 구성되었어요. 관련해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배수찬 씨의 사연을 ‘3rd Base’에 배치한 의도는 무엇인가요?
다큐멘터리도 하나의 스토리가 있는 건데 가장 하이라이트가 되는 부분은 뒤에 배치한 거죠. 배수찬 씨는 순수하게 야구를 하고 싶었던 사람인데 역사에 희생되고 말았죠.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는 바람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고 판단했어요.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1982년 봉황대기 결승전 참가 멤버들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구성으로 야구의 루 개념에 맞춰서 진행되잖아요. 배수찬 씨는 한국에서 프로야구단 코치로도 활동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돌아오지 못했잖아요. 저 먼 아르헨티나 타국에서 돌아가셨으니까 마음은 고향에 오지 못한 거죠. 그래서 홈 베이스에 들어오기 직전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배수찬 씨의 사연을 ‘3rd Base’에서 다뤘죠.

1968년 당시 북한 무장공비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해 청와대에 침투하려던 ‘1.21 사태’가 발생하면서 한국에서 야구를 하고 있던 배수찬 씨가 총련계라는 이유로 모진 고초를 당했죠. 그렇게 극단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그라운드의 이방인>에는 재일동포 야구팀이 한국에 와서 차별당한 부분도 언급돼요. 봉황대기 대회에서 재일동포 야구팀이 실수라도 하게 되면 한국 관중들이 엄청나게 환호를 했죠.
제가 일본인도, 재일동포도 아니어서 본격적으로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죠. 다만 한국인 입장에서 재일동포를 어떻게 봤으면 좋을지 넣고 싶었어요. 중요한 건 1982년 멤버들이 한국에 대해 느꼈던 감정, 이 사람들이 고향에 왔는데 제대로 대접받고 있는가를 탐구했던 거죠. 사실 우리가 이들에게 전하는 인상이 있잖아요. 그런 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어색하고 낯설고 움츠리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어요. 실제로 이 영화를 보신 후에 어떤 분이 재일동포 야구단이 한국에서 야구 경기를 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욕도 하고 그랬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되게 미안하더라, 라는 얘기를 하셨어요. <그라운드의 이방인>을 통해서 우리의 치부를 꺼내놓고 해법을 모색하고 싶었죠.

1982년 재일동포 야구팀 멤버들이 2013년 4월 두산 베어스의 개막 3연전 마지막 날 시구를 했죠. 이들이 시구를 마치고 원정팀 벤치 쪽으로 들어올 때 그전에는 별 반응이 없던 선수들이 손뼉을 치더라고요. 이를 변화라고 봐도 될까요?  
저는 다르게 느꼈어요. 프로 선수들이 1982년 재일동포 멤버들을 몰랐을 수 있겠죠. 보통 연예인이 와서 하는 똑같은 시구였던 거죠. 다만 한국의 야구 역사를 이야기할 때 재일동포 선수들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다뤘다면 기립하지 않았을까요. 한국의 원로 야구인들이나 레전드들이 시구를 한다고 했을 때 젊은 선수들이 앉아서 손뼉 치겠어요? 물론 선수들이 몰랐기 때문에 잘못한 건 아니에요. 야구팬들 중 적어도 한 명이라도 이 장면을 보고 그 의미를 알아 채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두산 베어스의 개막식 잠실 마운드를 섭외하는 과정은 어땠나요?
독립영화 하는 사람이 시구에 대해 부탁하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겠죠. 진행하면서 우리 힘만으로는 힘든 부분이 많았어요. 야구인 중에 임호균 전(前)삼미 슈퍼스타즈 선수와 조은성 프로듀서가 친해요. 임호균 선생님의 부인이 재일동포세요. 이해가 우리 일반 야구인들보다 깊은 거죠. 임호균 선생님이 활약하던 1980년대 당시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던 재일동포 선수들이 많았잖아요. 그 가치를 알거든요. 그래서 임호균 선생님이 두산 프런트에 얘기를 잘해준 거죠. 두산 베어스팀에 감사해요.
 
임호균 전 선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재일동포 야구단 일원 중 한 명이었던 현(現) 한화 이글스의 김성근 감독이나 1982년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재일동포 팀과 상대했던 군산상고의 당시 선발 투수였던 조계현 현 기아 타이거즈 코치도 인터뷰 영상으로는 볼 수 없었어요.
제가 좀 더 노력했다면 야구팬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유명 선수들을 섭외해서 인터뷰할 수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고민했던 부분은 그런 유명인들이 많이 나오면 잘 팔릴 수는 있겠지만, 제가 의도한 영화의 방향성에서는 엇나갈 것 같았어요. 민초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1982년 재일동포 봉황대기 멤버들은 유명세를 타지 못했고 역사에서 누구도 알아봐주지 않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위로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어요.  

<그라운드의 이방인>에 등장한 멤버들은 이 영화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양시철 씨(사진 오른쪽)는 처음 우리가 접근했을 때 굉장히 조심스러워 했어요. 한국의 잠실야구장에서 시구를 위해 마운드에 오르기까지 자신에게 온 이 상황에 대해서 의심을 했어요. 그런 고백을 듣고는 제가 정말 미안했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 봉황대기 출전을 위해 한국에서 와서 어떤 마음으로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졌을지 조금은 상상이 되더라고요. 양시철 씨가 재일동포 사회 안에서도 처지가 안 좋았어요. 고등학교 때 잘만 했으면 한국 프로야구팀에서 투수로 활약할 수도 있었는데 잘 안됐죠. 지난해 <그라운드의 이방인>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될 때 사비를 들여 부산에 오셨어요. 결혼하셨더라고요. 제가 유추하기로 한국에 와서 마음의 응어리가 풀린 게 아닌가,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건강하게 변해간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이 영화가 양시철 씨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해서 고마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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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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