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래가 시험대에 오른 새해를 맞이하였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국정 농단의 현실로 정치는 더는 영화의 소재로 장점이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지배적이다. <더 킹>은 그런 걱정에 아랑곳없이 썩은 내 나는 한국 정치의 작동원리에 대해 다룬다.
“국민은 개, 돼지입니다”라는 강렬한 대사로 기억되는 <내부자들>(2015)을 떠올리면 된다. <내부자들>은 한국의 기득권 세력인 정치인과 언론인과 기업인이 어떻게 하나 되어 국민 위에 군림하는지를 따라간 작품이었다. <더 킹>에도 그런 ‘내부자’가 등장한다. 이번엔 검사다. 박태수(조인성)라는 인물이다.
또 하나의 <내부자들>
<더 킹>은 박태수의 시선으로 진행하는 영화다. 박태수는 전라도 출신으로 원래는 양아치였다. 동네 패싸움이나 일삼던 그가 개과천선하는 계기는 좀도둑으로 연명하던 아버지가 검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다. 평소 아버지의 악행이 불만이었던 태수는 검사에 감정 이입하며 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렇게 서울대에 입학하고 사법고시도 최종까지 척척 합격한 태수는 바라던 검사가 되는 것에 성공한다.
기쁨도 잠시, 생각한 것과 다르게 검사 생활은 초라했다. 뭔가 엄청난 권력을 누릴 줄 알았는데 박봉에, 야근에 한 달이면 600~700건의 사건을 처리하는 일상은 샐러리맨과 다를 바가 없었다. 2년 동안 살이 5kg이나 빠졌을 때 맞닥뜨린 부조리한 사건 하나. 학교 선생님이 제자를 성폭행했는데 합의로 처리된 사건이었다. 가해자를 감옥으로 보내기 위해 재수사를 하던 중 태수는 선배 검사 양동철(배성우)의 연락을 받는다.
갑작스러운 동철의 방문은 이유가 있다. 동철의 직속 상관은 한강식(정우성) 검사다. 그는 검찰 내에서 실세로 통한다. 소위 ‘라인’을 잘 타서다. 태수가 감옥에 보내겠다고 재수사에 나선 성폭행 가해자는 한강식 검사와 인연이 있다. 동철 왈, 내가 태수 너 한강식 검사랑 일할 수 있게 소개해줄게. 단, 조건이 있다. 성폭행 재조사 이쯤에서 덮자. 정의구현이냐, 권력 잡기냐, 태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이에 대한 태수의 반응은? 그 묘사 방식이 흥미롭다. 한강식과 양동철은 전략부 소속이다. 이들의 수사실은 어둡고 은밀한 곳에 있다. 공개되면 이 나라가 들썩들썩할 자료를 보관하고 있어서다. 동철은 그중 하나를 집어 비디오플레이어를 재생한다. 청순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배우가 여러 남자와 몸을 섞는 영상이다. 이에 아랫도리가 불끈한 태수는 브라운관 속 배우를 보며 자위행위를 한다. 그러자 문제의 배우가 브라운관 밖으로 나오더니 태수의 몸에 올라타 섹스를 한다.
눈요깃감으로 보이지만, <더 킹>을 이해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섹스는 결합을 뜻한다. 전략 수사실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 태수는 잘못된 판결을 바로 잡아 정의를 세우려는 상식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겉으로는 청순한 척 뒤로는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는 배우와 성 관계를 갖는 건 기존의 태도를 버리고 불의와 야합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다. 안 그래도 태수는 동철의 주선으로 참석하게 된 한강식의 파티에서 문제의 성폭행 가해자 선생님과 화해의 술잔을 나누며 비리로 얼룩진 권력의 라인에 올라타게 된다.
태수, 또 다른 우리
한국의 현대 정치사는 몰상식과 비도덕과 비정상으로 무장한 권력에 맞선 약자들의 저항의 역사였다. <더 킹>은 전두환 군사정권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권력 실세에 빌붙어 꼬리 짓을 일삼은 이들의 악행의 메커니즘을 해부한다. 태수는 그 출발점이다. 뛰어난 스펙을 가졌지만, 일에 치여 사는 태수는 보통 사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가 권력의 라인을 잡기 위해 영혼까지 파는 이유는 무엇인가.
권력을 손에 넣으면 한국만큼 살기 좋은 나라가 없다. 국민연금에 거액의 손해를 입히고 기업을 합병한 기업인에게는 부정청탁과 대가성의 소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영장이 기각되고, 대통령과 친하다는 이유로 온갖 이권에 개입해 천문학적 이득을 취해도 모르쇠로 일관하면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한국 기득권 세력의 정신 상태다. 온갖 특권과 특혜와 검은돈이 뒤따르는 권력이기 때문에 한 번 맛보면 헤어나오기 힘들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다 보니 한강식과 양동철과 이들의 라인을 타는 박태수와 같은 이들의 권력을 향한 욕망은 거칠 것이 없다. 살아 있는 권력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까닭에 대통령 당선이 유력한 후보자의 측근을 만나 상대방 후보의 비리가 담긴 자료를 넘기는가 하면, 대선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경우에는 무당을 찾아 굿을 보며 점을 치는 등의 우스꽝스러운 행보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존심은 잠깐이요, 라인만 잘 타면 고생 끝이라는 생각에서다.
과연 그럴까. 지금 우리가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듯이 라인을 쫓는 권력은 허망하다. 영원할 것 같아도 언젠가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없어지는 성질을 지녔다. 다시 태수의 섹스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태수의 몸에 올라타는 배우의 모습은 TV 화면의 질감으로 묘사된다. 현실의 태수가 상상 속에서 몸을 섞어 얻게 되는 더러운 욕망은 비현실적인, 그러니까 잠에서 깨면 자각하는 꿈 같은 것이다.
한강식 앞에서 영원한 의리를 맹세했지만, 권력의 좌표가 이동하자 곧 버림받고 마는 태수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태수가 처한 상황은 현재 한국 국민이 직면한 처지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동안 잘 살게만 해준다면 어느 정도의 비리는 눈감아줄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부패한 권력에 눈을 감아왔다. 부패한 권력에 ‘더 킹’의 자리를 내어준 결과가 지금의 한국이다. 밝은 미래로의 도약이냐,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냐, 이제 그 자리의 주인을 바꿀 때가 됐다.
KDI 나라경제
2017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