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준익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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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의형제> 이후 기대 이하의 작품들로 ‘대실망 릴레이쇼’를 펼치던 한국 영화계에 오랜만에 찾아온 제대로 된 영화라 할만하다. 특히 뒤이을 홍상수의 <하하하>, 이창동의 <시>, 임상수의 <하녀> 등 상반기 최고 기대작 가운데 첫 주자라는 점에서 모아지는 관심은 뜨겁기만 하다. 그런 반응의 후폭풍처럼 4월 19일 언론시사회에서의 최초 공개 후 기자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지고 있다. 대체로 무난하다는 평이 줄을 잇는 가운데 <왕의 남자>(2005)의 이준익 감독의 작품이란 점을 감안하면 실망스럽다는 평가 역시 만만치 않다. 

비관적인 결말에 대한 아쉬움, 극중 인물들의 단선적인 캐릭터 묘사, 영화 시작부터 사건으로 몰아붙이는 이야기 전개의 의외성 등을 지적하는 부정적인 목소리가 작지 않은 것이다. 확실히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마당극 구조에서 비롯된 해학의 감성이 그대로 결말까지 이어지던 기존 이준익의 사극영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이들에게는 파격적으로 다가간다. 이미 배우와 스태프 등 내적 구성에서부터 전작과 안녕을 고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사극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극의 구조부터 세계관까지, 그 어느 것 하나 관객의 예상치를 빗나간다. 그런 점에서 영화에 대한 엇갈리는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된 바라고 하겠다.

다만 부정적인 평가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 완전히 인정하지 못하겠는 것은 이 영화가 가리키고 있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을 살짝 변형해 표현하자면, 달을 가리고 있는 구름 때문에 정작 달의 형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영화는 개봉과 함께 감독의 손을 떠나는 것이지만 설명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든 것은 이런 배경이 작용한 결과다. 

이준익 감독과의 인터뷰는 4월 23일 삼청동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카페 ‘코인’에서 2시간 동안 이뤄졌다. 대개 인터뷰의 시작은 가벼운 농담이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본론을 우회하기 마련인데 첫 질문부터 이준익 감독은 과녁의 정 가운데를 겨냥해 들어왔다. 마치 인물에 대한 소개 없이 바로 황정학과 이몽학의 대립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영화의 첫 장면과 흡사한 태도였다.


* 주의! 이 인터뷰에는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될 만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허남웅 기자(이하 ‘허’) 언론시사회 이후 기자들의 반응이 엇갈리던데요.
이준익(이하 ‘이’) 당연히 엇갈릴 줄 알았어.

어떤 점 때문에 그렇게 예상하셨나요?
이야기 끌고 가는 방식을 새롭게 시도했거든. <왕의 남자> 때는 사연을 만들어 사건으로 전진하는 식으로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가는 구조였다고. 근데 또 하고 싶겠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원작만화는 황정학과 견자의 버디 이야기잖아. <라디오 스타>(2006)에서 한 거 아니야. 감독이 자기가 싼 똥에서 콩나물 뽑으면 이상하잖아. (웃음)

한 번 시도했던 건 절대 하지 않으시겠다는 주의시군요. (웃음)
그렇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원작은 1인칭 심리 성장극이면서 버디 오디세이야. 근데 이 원작을 가지고 또 오디세이 같은 여정? <님은 먼 곳에>(2008)에서 다 한 거라고. 그렇게 하는 건 지금의 이준익에게는 흥미가 없다는 거지. 원작을 체로 걸러서 좍 한 번 빼면 잔모래들이 빠져나가고 요만한 자갈들도 빠져나가. 그럼 (주먹을 쥐며) 이만한 짱돌이 몇 개 남을 거 아냐. 그게 이몽학이야. 그건 절대 안 빠지는 거야.

그래서 원작에서는 조연급 차원에서 그쳤던 이몽학의 비중을 영화에서는 주연급으로 크게 키우셨군요. 
견자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가장 큰 존재는 황정학. 황정학 이전에 태생적 조건이 아버지인데 견자에게는 생리적 아버지는 있으나 사회적 아버지가 부재한 콤플렉스가 있다고. 사회적 아버지 부재는 사회의 제도적 문제니까 당연히 다른 신분들, 즉 왕이나 동인이나 서인, 영화에서 보여주는 대동계라는 이몽학의 주변인으로써 방짜쟁이(정규수)나 안봉석이나 이장각이나 이런 인물들만 남는 거야. 내가 찍고 싶은 영화는 이거였구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주인공을 설명하는 영화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영화가 시작할 때는 길거리에 있던 개새끼 한 마리를 영화가 끝날 때가 되면 이몽학의 야망의 종점이었던 선조가 앉았던 자리에 반드시 앉히고 싶었어. 1시간 50분 안에 거기에 앉히려면 많은 것들을 거르고 달려가야 하잖아. <왕의 남자>보다 더 뜨거운 라스트를 만들지 않을 거라면 그 시대로 가서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는 거야. 그러다보니까 시작부터 사건으로 시작하게 된 거야. 사건으로 시작해서 사연을 거쳐 또 사건으로 끝나니까 그 전에 내 영화를 보던 관전 포인트로 관람하게 되면 당혹스러운 거야.

인물을 소개하고 사건으로 들어가는 전통적인 이야기 방식과는 확실히 다른 전개였어요.
인물의 사연이 쌓이고 관계가 맺어지면서 가야 감동이 오고하지. 이거 무슨 초반부터 마구 지르고 가버리니까 관전 포인트에 이해와 오해의 간격이 발생할 것이라고 나는 당연히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왕의 남자>와는 다른 어떤 것이 궁금했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좋은 반응이 있을 거고, 그래도 이준익에게 따뜻한 시선과 감동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이게 모야’ 당황하게 될 거라고. 그렇게 갈린 거야. 근데 감독 입장에서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라고. <왕의 남자>를, <라디오 스타>를, <즐거운 인생>(2007)을, <님은 먼 곳에>를 답습할 바에는 이 영화를 왜 찍어, 안 찍지. 뭔가 다른 거를 던져주고 싶은 욕망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찍은 거라고.


개새끼가 왕의 자리에 오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잘 알려진 대로 박흥용 작가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했다. 다만 박흥용 원작이 견자의 성장을 3권에 걸쳐 내면과 외면을 오가며 총체적으로 조감한다면 이준익의 영화는 황정학(황정민)과 이몽학(차승원)의 대립을 견자(백성현)의 성장으로 매개 삼는다. 원작이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서 개인에 더 방점을 둔 것에 반해 영화는 사회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설정한 후 비로소 그 안에서 지지고 볶는 개인들을 이야기한다. 이는 사극이라는 장르를 통해 마당극을 원형 삼는 이준익 영화의 특징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만의 특징이라면 현실의 반영이란 점에서 가장 독한 형태로 은유가 이뤄진다는 것. 때는 1592년, 왕은 백성의 안위에 대해 신경을 끊은 지 오래고 좌우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대동 세상’을 꿈꾸던 황정학과 이몽학은 그 방법을 두고 이견을 보여 서로 대립하기에 이른다. 결국 공석으로 남은 왕의 자리는 ‘개새끼’(犬子)가 차지하니, 결국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허망한 욕망에 관한 영화다.

감독님의 이전 작품을 보건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를 영화화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일단 사극이란 점이 있고, 남자들의 권력을 향한 야망에 부정적인 감독님의 성향과 원작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고요.
그럼, 그럼. 영화를 찍는 이유는 한두 가지로 설명하면 오해 투성이로 발전하기 때문에 백가지 이유가 있지. (웃음) 우리나라 만화 원작에 관한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최고라고 생각해. 대부분의 만화가 현대물이고, 일본 만화를 벤치마킹하는 과정 안에서 우리 만화의 정서가 시작된다고. 청소년기에 이런 만화들을 통해서 세계관을, 자의식을 수혈하는 건데 프랑스나 일본에는 역사 만화가 많다고. 프랑스에는 제국주의를 펼칠 당시의 무용담이 참 많다고. 우리나라에는 역사 만화가 별로 없어. 그나마 있어도 무슨 활극이야. 근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박흥용 원작의 만화 중에서 최초로 영화화가 된 작품이야. 이 만화는 역사 만화 중에서 인문학적인 토대가 가장 튼튼해.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실존 인물이야.

설마 황정학은 실존 인물이 아니겠죠?
나도 심지어 황정학이 실존 인물인지 몰랐어. 원작자한테 들어서 알았다고. 황정학이 조선 선조 때 우리나라 침술계에에서 활약했던 분이라는 거야. 깜짝 놀랐어. 그만큼 원작자가 인문학적 근거를 치열하게 조사해서 만들어 놓은 거라고. 한국에서는 만화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하위 장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대한민국의 만화에도 이만큼의 깊이와 철학과 세계관이 있는 작업을 한 작가도 있다.   

판권은 언제 구입하신 거예요?
5년 전에.

원래 1995년에 나온 작품이니까 벌써 15년 전인데요. 그동안 많은 제작사와 영화사 관계자들이 판권을 노렸을 텐데요.
10년 전에 애니메이션을 한다고 5년인가 작업하다가 지지부진해서 완성을 못했잖아. 그래서 사게 된 거야.

원작은 이미 그 전에 접하셨던 거죠?
그럼 15년 전에 연재할 때부터 읽었지. 연재하다가 끊겨서 나중에 단행본이 나왔을 때 다 봤어. 

원작에 그런 에피소드가 있잖아요. 견자가 고을원을 치려고 하는데 고을원의 어머니가 나와서 살려달라고 빌어요. <황산벌>에서 계백(박중훈)이 죽을 각오로 전장에 나가기 위해 처자식 목숨을 모두 끊으려고 하잖아요. 그때 계백 처(김선아)가 “호랭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아가리는 삐뚤어졌어도 말을 바로 해라. 호랭이는 가죽 땜심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땜심에 죽는 거여. 이 인간아!”라고 일갈하는 장면의 의미가 흡사하다는 인상이 들었거든요. 그걸 베꼈다고 얘기하려는 건 아니고요. (웃음) 그만큼 박흥용 만화가와 감독님의 세계관이 일치해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만화를 보시고 얼마나 영화로 만들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거의 연결성은 없었어. 지금 들으니까 알겠네. 닮아있어. 원작자 그 양반하고 나하고 나이가 비슷해. 1960,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사람들, 특히 어떤 역사라든가, 문화적인 부분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들이 도달하는 지점이 있다고. 그 지점에 대한 어떤 동질성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만화와 영화라는 장르의 차이와 관객의 차이에서 차별화된 세계관들이 구현될 뿐이지.

인물을 다루는 비중부터 원작 만화와 영화는 많이 달라요. 만화가 견자를 축에 놓고 황정학과 이몽학을 통과한다면, 영화는 황정학과 이몽학이 축을 이루면서 견자가 통과하는 구성이에요.
견자는 견자 하나로써 소중한 게 아니라 견자를 성장시킨 주변이 더 소중해. 황정학, 이몽학, 백지(한지혜), 그 많은 여자들과 방짜쟁이까지. 원작에서 뺀 거는 환쟁이. 환쟁이는 금강산에서 견자를 수련시키는 역할인데, 그걸 1970년대 영화마냥 견자를 무술의 고수로 만들기 위해서 음악 깔고 몽타주로 좌르륵, 이걸 해야겠냐고, 이상하잖아. (웃음)

만화를 보고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린 영화적 이미지는 무엇이었나요?
성장이야. 우리나라에 성장 드라마가 굉장히 없어요. 성장 드라마는 대부분 외국 것에 전염되어 있다고. 1960,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우리 세대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여자는 <어린 왕자>, 남자는 <갈매기의 꿈>을 보고 영혼을 거기다 실었던 거야. 그 정도로 우리나라에 대표적인 성장드라마가 별로 없어요. 근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 만화가 개인의 내면에 있는 여러 가지 장애물을 거치면서 진짜 성장을 다룬다고. 알을 깨고 나와. 황정학도 양반으로 태어났지만 장애인이어서 독 속에 가둬진다고. 그 장독을 깨고 나오는 성장의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고. 견자 역시 사서삼경을 다 읽었지만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그 자신을 사회적으로 구현하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어. 이몽학조차도 왕족이었으나 서얼인 거야. 백지 역시 기생이야. 기생은 대를 물린다고. 그 네 명 주인공의 탄생의 조건이, 태생의 조건이 사회적인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거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자신을 연마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진통을 그린 만화거든. 그런데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서양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나서 자본주의로부터 엄청난 상처를 받고 이미 성장했을 때 부상병이 되어서 사회에 나와. 자긴 안 그래?

그렇죠. 치료를 못 받아서 여전히 비정규직 기자로 간간히 글 쓰고 있는데요. (웃음)
나도 그래. (웃음) 왜? 문화시민이 못 돼서 그런 거야. 수직 계열화된 사회에서 수직구조의 탄생은 정치에서 시작한다고. 그 다음에 경제 서열화. 근데 문화는 서열이 없다는 거야. 정치, 경제, 사회는 다 서열이 있어. 문화만 서열이 없어. 그래서 문화 국가가 선진국인 거야. 우리나라는 문화의식이 제일 낮아. 전 세계에서 제일 후진 나라는 정치권력이 센 나라야. 중진국은 어디야? 경제 권력이 센 나라.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아니야. 중진국이라고. 경제 권력이 다 잡고 있는 거 아냐. 몇 천 년 동안 지구 인류의 이데올로기는 민주주의를 향해서 왔거든. 민주주의의 종점은 수평사회라고. 지금 우리는 수직구조에서 수평구조로 넘어가는 진통을 겪고 있는 거라고. 기성세대, 지금의 30~40대는 아직 수직구조 안에 묶여 있잖아. 하지만 20대들은 수평구조로 살고 있어. 스티브 잡스가, 안철수도 그 말을 계속하는 거야. 수평사회, 수평구조.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창의성 있는 제품을 싼 값에 독점권을 가지고 팔아서 백 원을 벌면 삼십 원 주고 자기는 칠십 원 갖잖아. 이게 수직구조야. 근데 애플은 모냐. 어플리케이션 자기들은 삼십을 먹고 칠십을 줘. ‘지금 소프트웨어를 생산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경제 미래는 없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야. 이건희가 한 말이야. (웃음) 빨리 수평구조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영화적으로 함축하는 것은 왕이나 개새끼나 다 똑같다야. 영화의 1시간 40분이 지나면 개새끼가 왕의 자리에 가 있거든. 별 거 없어. 수평이다. 그러한 메시지가 이 영화의 구조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놓은 거라는 거지. 그것을 판독해달라는 게 감독의 바램이고.

그것이 황정학과 견자가 수평으로 서 있는 투 숏 구도를 강조하신 이유군요.    
그게 인간의 천진성이라는 거야. 할아버지가 밖에서는 근엄하게 굴지만 집에 들어오면 손자 앞에서 꼼짝 못하잖아. 아버지가 집에서는 부모 공경하고 자식들 그렇게 사랑하지만 밖에만 나가면 야수처럼 돌변해. 온갖 불법과 비리와 탈세를 저지르고 거기서 번 돈을 가정을 위해 너무 아름답게 써. 그지? (웃음) 사회적 도덕심 부재라는 거지. 가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병폐야. 가족에 명분을 두고 사회에 악행을 저지르는 게 사회인이냐고. 반 사회인이지.

견자의 성장은 곧 가족주의의 병폐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겠군요.
원작을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견자의 어떤 내면의 성장, 성장의 장애는 한계거든. 원작에는 끊임없이 한계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어.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성장의 자유영혼을 얘기하고 있다고. 그런 것을 도와주는 어떤 콘텍스트들을 영화의 텍스트 안으로 집어넣은 게 나의 세계관이지. 박흥용 원작의 훌륭한 세계관을 토대로 이준익이라는 감독이 영화로 찍으면 이준익의 세계관을 덧씌워져야지, 컨버팅이 돼야지. 그러지 않으려면 모하러 영화를 찍어. 원작만화는 심지어 15년 전의 작품이라고. 그럼 박흥용 원작자가 15년 전이 아니라 지금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만화로 한다면 똑같지 않다는 거지. 그런 것이 원작과 영화를 구분하고 분석하는 관전 포인트다.


<왕의 남자>의 거짓 희망을 부정하다

이준익 감독은 그 자신이 사극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과거로부터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현재는 과거에서 왔다고. 과거를 정확하게 보면 미래는 명확해지는 거야. 과거를 도외시하니까 과거를 더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되지. 구름이 꽉 찼지. 그 구름 좀 걷자 이거지.”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출발은 이준익 감독에게 지금의 영광을 가능케 했던 <왕의 남자>를 다시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왕의 남자>의 결말은 ‘거짓’ 희망이었단다. 당시에는 희망이 통용되는 사회였을지 모르지만 <왕의 남자>의 결말이 보여준 한줄기 빛은 어둠에 잠식된 지금 우리 시대에 유효기간이 지난 지 오래란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비극적인 결말은 지극히 냉정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단, 이 영화가 보여주는 비극은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시 일어서라는, 시작하라는 일종의 경고이자 어른의 충고다.  

15년 전에 나왔지만 원작만화가 은유하는 세상의 정치는 오히려 당시보다 지금에 더 어울려요.
영화나 만화나 소설이나 역사의 내러티브를 형성하다 보면 결국에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어. 420년 전의 사회를 15년 전의 어떤 만화가가 그리는데도 권력과 신분의 갈등 관계 속에서 한 인물의 성장성을 그릴 수밖에 없다고. 15년 후인 2010년에 영화를 찍는 내게도 역시 마찬가지야. 현존하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설명할 수밖에 없다, 라는 거야. 그것이 사극을 찍는 작가의 의무야. 그것을 배제하고 옛날처럼 에로사극이나 찍으라는 거야? <변강쇠>처럼. (웃음)

그래서일까요, 감독님의 작품은 사극과 현대극을 오가는데 사회를 향한 비판정신도 그렇고, 이야기의 형식도 사극에서 더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 같아요.
당연하지. 문화의 권리라는 거야. 어떤 집단을 통치하기 위한 이념으로서의 정치적 권리나 권력이나 그거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해.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하지만 관심이 없는 그가 정치로부터 자유로운가? 그건 정치의 권리거든. 그건 존중 받아야 해. 경제도 마찬가지야. 나는 아예 돈에 관심이 없어. 그렇다고 굶고 살아? 안된다고. 그러니까 경제의 권력도 그 권리를 존중 받아야 해. 그것과 똑같이 문화도, 문화 권력도 그 권리를 존중받아야 된다는 거야. 영화는 문화의 한 장르라고. 그럼 영화는 온전하게 영화 자체의 권리가 부여되어 있다는 거지. 마치 정치와 경제가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세계관을 펼칠 수 있는 거야. 어떤 유권자가 공약을 내는 것은 자기의 세상에 대한 세계관을 얘기하는 거야. 나는 가난한 자들에게 보탬이 되는 정치를 하겠다. 그 사람의 세계관이 그건 거야. 그럼 믿어야지. 

인간의 권력욕에 대해 회의하면서도 다시 인간에게 희망을 찾는 <황산벌>이나 <왕의 남자>와 달리, 이번 영화에서 감독님의 세계관의 체감온도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과거의 영화였다면 견자는, <황산벌>의 거시기처럼 목숨을 부지해 권력과는 뚝 떨어진 생활을 했을 텐데 이번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왕의 남자>에서도 똑같이 죽었어. 그렇긴 한데 <왕의 남자>에서는 희망이 보였다고. 근데 이번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는 완전히 비관적인 쪽으로 갔어. 왜냐면, <왕의 남자>가 내게는 영광이기도 하지만 굴레이기도 하다고. 시간이 지났으니까. <왕의 남자>가 가지고 있는 허상에 대해서 내 스스로가 비판해야 된다고 생각해. 작가는 자기 부정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관을 갖는다는 거지. 자기 부정을 안 하고 계속 자기 연민이나 동정을 하고 있으면 이미 작가가 아닌 거야. 결국 <왕의 남자>가 가지고 있는 희망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거짓이라는 거지.

거짓 희망일지라도 거기서 행복을 느낀 관객이 무려 1230만 명이었습니다. 사실 거짓 희망일지라도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 상업영화 감독의 역할일수도 있는데요.
거짓 행복인 거지.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고.’ ‘니가 죽어서 광대가 될래.’ 아, 씨발 거기에 된장 풀어놓으니까 현혹이 돼가지고 1200만 명이 본 거야. (웃음) 그러니까 그로부터 5년 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라스트 장소가 <왕의 남자> 라스트 장소랑 똑같아. 근데 <왕의 남자> 생각이 안 난다는 거야. 그게 나의 목표였거든. 나는 목표를 달성했어. 나는 너무 행복해. 적어도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왕의 남자>랑 많이 비슷합니다.’ 이 소리 안 들은 것만으로도 나는 성공했다고 생각해. 

시대가 변했고, 그에 따라 감독님의 영화관도 바뀌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왕의 남자>와 대척점에 있는 결말은 모냐면, 거짓 희망을 관객들에게 던져주는 시대가 아니다. 지났다. 2010년 지금의 젊은 애들에게 거짓된 희망으로 입장료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요즘의 젊은이들을 향해 꿈이 없는 세대라고 말하잖아. 꿈을 키우려고, 성취하려고 대학교에 들어갔더니 서울대, 고려대 학생이 대자보 붙여놓고 자퇴를 했어. ‘대한민국 대학은 대기업의 제품 생산 교육만 시킨다.’ ‘나의 꿈은 그게 아니다.’ 그러고 자퇴를 했어. 그 대자보를 보고 있는 학생들은 행동하지 않았지만 그 심정이 어떨까, 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그전에 88만원 세대라고 우석훈 박사가 말했지만, 문화적으로 보면 나는 약정세대라고 봐. 대한민국 청소년 중에 약정에 안 걸린 사람 있나 나한테 얘기 좀 해줘봐. 약정을 안 걸면 새로운 기술을 쓸 수 없도록 만든 사람들이 386세대라는 거야. 386세대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광장에서 외친 결과가 지금 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서 밑에 세대 젊은이들을 약정으로 묶어버린 거야. 빨리 이 약정을 풀어야 아이폰을 살 수 있고 또 다음 약정을 걸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 그럼 열심히 ‘알바’ 해서, 비정규 노동을 해서 돈 번 후 다시 약정을 걸고, 재약정을 걸어야지만 현대 사회의 시스템으로부터 이탈되지 않는다는 거야.

그 젊은 세대가 바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견자인 거군요.
그게 나는 견자라고 본다고. 견자는 아버지로부터 풀리지 않는 약정이 있었어. 생리적으로 아버지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아버지가 아닌 거지. 제사에 와서 술 한 잔 놓으려고 하는데 형제들이 그걸 못 놓게 해.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잖아. “아버지 얘기해. 나 아버지 아들 아니라고 얘기하라고. 그럼 안 올 거 아니야.” 근데 그 약정에 걸려 있는 거야. <왕의 남자>는 ‘관계 맺기’였다고.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해체’야. 전부다. 정반대의 영화인 거라고. 대동계는 처음부터 관계가 깨져. 황정학과 이몽학이 갈라서고, 이몽학은 정여립을 죽이고, 그리고 남의 관계도 해체시켜. 견자의 아버지를 죽여. 해체된 견자를 다시 살린 황정학이 새로운 가족을 구성해. 견자는 멘토를 따라간다고. 그 와중에 백지를 만나는데 백지로 인해서 황정학과 견자의 관계도 해체돼. 게다가 백지는 이미 이몽학으로부터 해체돼 있는 걸로 시작해. 그리고 군신의 해체, 파벌의 해체, 전부 해체야. 새로운 구조를 탄생시키는 것은 과거의 구조를 해체하는 거지. 그게 해체철학 아니야. 헤겔이든, 쇼펜하우어든, 누구든. 철학은 해체부터 시작이라고. 견자라는 통로를 통해서 현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바라보니까 결국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약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존재더라고. 그 끝은 정말 비극적이지. 더 이상 상대방의 가치를 부정하지 말자, 라는 역설적, 변증법적 논리라고. 부정하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간단히 말해서, 모두 해체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말씀이시군요.
오른쪽 날개가 왼쪽 날개를 비난하고, 왼쪽 날개가 오른쪽 날개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 한쪽 날개만으로 새는 날아가지 못한다고. 이미 새가 아니야. (웃음) 서로 상대의 가치를 존중해야만 새가 온전히 날 수 있는 게 좌우의 목표야. 그게 원래 좌우의 논리야. 민주주의는 그래서 생긴 거라고. 동인, 서인을 만들게 된 본래 취지는 좌의정과 우의정을 놓고 균형을 잡겠다고 한 거야. 근데 씨발 좌의정, 우의정 새끼들이 도망가는 것도 의견 통일을 못하니까 내가 해체를 해버린 거지. (웃음) 이럴 바엔 차라리 해체를 해라. 그럼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거짓 희망을 주지 않고 있는 그 자체를 인정하면, 절망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진짜 희망이 보인다고. 절망이 두려우니까 자꾸 가짜 희망을 던지잖아. 그 가짜 희망을 던져서 중독 시키는 게 뭐냐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야. 예를 들어, 이몽학이는 일그러진 영웅이라고. 자, 이몽학이를 <브레이브 하트>처럼 그리라면 못 그리겠냐고. 내가 <글래디에이터>로 왜 못 그리겠어. (웃음) 그게 진짜 영혼이고, 진짜 희망이야? 가짜야, 가짜. 가짜 희망이라고. 그 가짜 희망에 우리 영혼을 팔 수 없는 거 아니냐는 거지. 그래서 이몽학이를 그렇게 그린 거야. 상업적으로 불리하지. 상업영화 감독으로써 난 정말 자해를 한 거지. (대폭소) 미친놈이지 내가, 미친놈이여. 아이씨, 이준익은 미친놈이다. (웃음)

이번 인터뷰 제목 나왔네요. ‘씨발, 이준익은 미친놈이다.’ (웃음)
지가 자기를 자해하고 <왕의 남자>를 부정하고, 영웅을 부정하고. 왜? 모든 영웅에는 인간적인 결함이 없냐? 다 결함이 있잖아. 왜 할리우드 영화의 영웅은 전부 다 가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민족을 위해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치냐고. (웃음)

저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안티 히어로 영화로 봤어요. 구지 할리우드 영화와 비교하자면, 한국판 <왓치맨>이랄까요. <왓치맨>의 주인공들이 인류 구원을 외칠수록 세상은 오히려 더 수렁에 빠지잖아요. 이몽학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요. 대동을 외칠수록 하나로 단합하기보다는 적들이 더 생기는 형국이죠.
그럼, 그거야. 맞아. 이미 미국에서도 여러 가지 영웅이 아주 다변화돼서 나오지. 전에는 영웅주의 영화가 나왔어. 근데 <다크 나이트>처럼 자신의 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영웅에 대한 표상을 부정하게 된다고.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보면 황정학의 모든 대사는 은유로 되어 있어. 구름에 달이 어쩌고저쩌고 황정학 대사는 씨발 욕 빼면 다 은유야. 이몽학이 얜 직유야. 은유와 직유의 충돌이라고. 그러니까 물과 기름이야. 절대 안 붙어. 일부러 그렇게 한 거지. 캐스팅도 그래. 황정민하고 차승원이 한 영화에 나온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그런 것들을 충돌시키는 거 자체가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나는, 영웅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영웅주의는 위험하다고. 페미니티는 존중받지만 페미니즘은 위험하다는 거야. 여성성은 위대하지만 여성주의는 뭔가 위험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적어도 난 영웅주의는 그리고 싶지 않다는 거야. 거짓 희망이니까.


전작을, 캐릭터를, 그리고 역사를 해체하다

만약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이준익의 기존 영화세계를 기대했던 관객에게 낯설게 느껴진다면 단순히 비극적인 결말을 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물을 구축하는 방식도,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도도, 심지어는 화면의 때깔도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에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이준익 영화의 또 다른 출발점이다. “변곡점이야. 스태프들(정정훈 촬영감독, 김수철 음악감독 등)도 그렇고 배우들도 다 처음 작업하는 거야.” 그래서 감독은 관객들도 이 영화를 기존과 다른 관점에서 봐줬으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한마디로 자신의 영화를 잘게 해체해달라는 것. 이는 지나친 상업적 목적을 경계하는 이준익 감독의 에두른 표현이기도 하다. 단순히 관객을 수동적으로 만들어 감정적 유희를 일방적으로 제공하기보다 감독 ‘대’(vs) 관객이 아닌 감독’과'(&) 관객의 수평의 관계에서 토론하고 이야기하고픈 영화적 대동 세계의 바람인 것이다. 

<즐거운 인생> 때였나요, 이런 인터뷰를 하신 적이 있어요. “인생 뭐 있어? 놀아” 근데 대표적으로 이몽학은 그 반대 지점에 있는 인물이에요. 영웅인척 굴지만 실은 무능한 왕에 대한, 반대파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있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왕이 도망갔다는 얘기를 듣고 이몽학이 좌절하는 것은 왕이 도리를 저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처리해야할 복수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맞아, 그런 거야. 원래 시나리오에 있던 대사 중에 너무 직접적으로 관객을 가르치는 것 같아서 하나를 뺀 게 있어. 교훈적인 영화를 찍으려고 하면 부작용이 나잖아. 이 영화는 개새끼 한 마리가 왕의 자리에 앉는 거잖아. 견자가 앉았던 왕의 자리는 이몽학이 앉으려고 했던 자린데 먼저 도착한 거야. 보니까 별 거 아니거든. 백지가 왕의 자리에 앉아있는 견자를 쳐다보고 있다고. 저 자리는 이몽학의 꿈이었다고. 그때 이몽학이 나타났어. 백지가 모라고 그래. “더 이상 갈 데가 없네. 겨우 여기 오려고 떠난 거야?” 이몽학이는 할 말이 없잖아. 견자 재는 거기 가서 앉아있는데. 걔도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모라 그래. “저기 앉으려고 그 많은 사람 죽인 거냐. 니가 왕의 되면 달라질 것 같아. 대동 세상? 웃기지 말라고 그래. 그런 세상 한 번이라도 본 적 있어, 씨발!” 이거라는 거야. 대한민국의 미래는 지금의 이십대들에게 있다고. 우리가 이십 대 때 어른들한테 그런 얘기를 들어서 지금 바로 그 미래에 와 있는 거야. 와있으나 지금 우리가 밑에 애들한테 더 그러고 있잖아. 그걸 견자의 입을 통해서 정확하게 전달했고, 왜곡된 신념들이 충돌한 게 복수가 된 거야.

말씀하신 대사는 극중에서 나오지 않나요?
가만 있어봐. (웃음) 거기에 “니 꿈이 소중하면 남의 꿈도 소중한 줄 알아야지” 이런 대사가 있었다고. 뺐어. 먼저 황정학이 이몽학이 목에 칼을 댔단 말야. 그걸 황정학이 이몽학이를 못 죽이겠어? 안 죽인 거라고. 왜 안 죽인 걸까.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서. 황정학이가 이몽학한테 딱 찔리고 나서 그러잖아. “몽학아 한양 가지 마라.” “우리가 같이 꾼 꿈이 이거 아냐?”(이몽학) “아녀, 아녀. 다 죽는 꿈이여.” “난 이 꿈을 깨고 싶지 않소.”(이몽학) 자기 꿈이 중요하면 남의 꿈도 중요한 걸 알아야지, 씨발. 황정학이 딱 죽으면서 그러잖아. “몽학이는 떨어지는 해를 쫓아갔는디. 그 몽학이가 구름이냐, 달이냐.” 구름은 헛된 욕망, 달은 어떤 표상이야. 달은 뭔가 달성하고 싶은 가치라고. 그 가치마저도 없애버려라. 마지막에 견자가 달을 베는 장면으로 끝나잖아. 그래서 허허허허 웃는 거야. “저 자식이 내 제자 맞네.” 어떠한 표상마저 없애는 거야. 대학을 들어가서 가르치는 표상, 대기업의 제품으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올라가. 도서관에 가서 다 시험공부하고 있잖아. 학문은 무슨 학문이야. 그 가치를 쪼개는 거라고. 달이라는 표상을. 내가 너무 영화를 어렵게 찍어 놓아가지고 사람들이 거기까지 풀지를 않아. (웃음)  

오히려 캐릭터가 너무 단순화되어 있다고 불만들이 더 많죠. (웃음)
그건 이유가 있어. 그게 사실 이몽학 대목에서 캐릭터의 단순성이 지목 받을 수 있어. 다른 방식으로 그걸 표현한 거야. 이몽학 주변의 인물들과 같이 이몽학의 내면을, 그의 진정성이든 가식이든 그걸 이몽학 주변 인물로 다 구현했다고. 대표적인 인물이 방짜쟁이야. 방짜쟁이는 오로지 이몽학을 위해서만 종사하고 있다고. 심지어는 친구인 황정학마저 배제해. 그리고 이몽학 밑에 안봉석은 안봉석대로, 이장각은 이장각대로 썩어빠진 세상을 쓸어버리려고 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성분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거야. 성과보다 성분이 더 중요하다는 게 안봉석의 입장이라고. 이장각은 그 성분 중요한 거 알지만 성과를 올려야 성분도 존중받는다는 거 아니야. 그러고 수원성에서 대립하고 있잖아. 근데 이몽학이 확 찔러 죽이잖아. 이몽학을 표현하는데 있어 입체적인 캐릭터는 주변 인물에 저장해 놓은 거라고.

백지도 이몽학만 바라보고 있죠.
심지어 백지마저도 이몽학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고. 자, 견자와 백지가 성황당에서 비 맞으면서 앉아있어. 그때 백지가 이렇게 얘기해. “너 황처사 왜 안 따라갔어? 너 이몽학한테 안 돼.” “왜 안 돼?”(견자) “꿈이 없잖아.” 이몽학의 꿈을 백지가 얘기해주는 거야. 무슨 꿈? 좆같은 세상 쓸어버리겠다는 거야. 견자 넌 약정 풀려고 온 거 아니야. (웃음) 그건 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지.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이몽학이야. 소나 개나 다 이몽학이라고 그러잖아. 이몽학을 구축하고 있는 캐릭터는 그 주변으로 다 설명을 해놨어. 그런데 이몽학이가 입체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은 영화를 너무 평면적으로 본 거야. 평면적인 눈으로 보면 이 영화는 평면적이야. 하지만 입체적인 눈으로 보면 너무나 입체적이야. (웃음)

그래서 이렇게 인터뷰가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요. (웃음)
물론 영화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구름이 걷히고 제대로 보인다고. 나는 아직까지 내가 구름 안에 있어. 내 안에 먹구름이 꽉 찼어. 문제 제기를 하면 지금 내 입으로는 변명을 할 수밖에 없다고. 2,3년이 지나고 나면 비로소 이 영화의 온전성이 내 눈에 보이지 않을까 싶어. 구름이 걷히지 않을까. 나의 현실이 있거든. 나의 현실은 <왕의 남자>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 첫 번째와 그동안 찍어왔던 영화를 통해 아까도 얘기했지만 드라마투르기를 다 했어. 인물의 입체성을 쌓아가라고 하면 나한테 어려운 게 아니야. 그럼 그 앞의 영화들은 모야. 몰라서 그렇게 했겠냐고. 정확한 의도가 있어서 그렇게 한 거라고. 왜 이준익 감독이 이리로 갔을까. 그걸 다른 방식으로 입체적으로 했다는 거지. 그걸 발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나의 변명이 있는 거라고. 연산군은 몇 십 년 동안 모든 드라마나 영화에서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졌어. 근데 <왕의 남자>에서 그 폭군 안에 내재된 감정을 얼마나 입체적으로 그렸어. (웃음) 그 이상 어떻게 입체적으로 그려. 내가 이몽학 그거 못하겠냐고. (웃음)

이몽학은 일종의 주변부를 통한 캐릭터의 해체로 봐도 될 텐데요. 특히 이몽학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에서 해체가 두드러졌어요. ‘이몽학의 난’은 1596년에 일어났는데 영화는 임진왜란이 터진 1592년에 벌어진 것으로 설정하고 있고요, 견자의 손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이 이몽학의 목을 베어 항복했죠. <황산벌>과 <왕의 남자>에서도 그랬지만 감독님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차용하는데 별로 관심이 없으세요. 
역사는 기록인데 승자의 전유물이잖아. 그러니까 난 기록을 믿지 않아. 기록을 다 의심해. 일단 난 글을 믿지 않아. 책을 안 믿어. 책은 거짓말이 가능해. 내가 요즘 좋아하는 책이 독일 물리학자가 쓴 건데 멋진 제목이야. <진리는 거짓말쟁이의 발명품이다> 책 안에 진리가 있다잖아. 그 진리가 거짓말쟁이가 만든 발명품이라는 거야. 너무나 멋있는 말이야. 말도 거짓말 할 수 있고 표정도 거짓 표정 지을 수 있고 글도 거짓말 할 수가 있어. 내가 믿는 건 딱 하나야. 소리. 목소리는 거짓말을 못 해. 그래서 거짓말 탐지기를 소리로 하는 거야. 소리는 생리거든.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나는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소리를 들어. 근데 글은 거짓말을 해. 책의 반은 다 거짓말이야. 난 거짓말을 찾으려고 책을 보지 역사적인 사료를 보는 순간, 거짓말이 어디 있는지를 찾는 거야.  

그래서 관객들이 더욱 이 영화를 해체해서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시군요.
그것처럼 관객은 내 영화를 해체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내 영화가 이러이러하니까 이렇게 알아주세요.’ 하는 거는 감독으로써 굉장히 비겁하다고 봐. 이몽학이 그러지, “황처사가 그러대. 양반은 권력 뒤에 숨고, 광대는 탈속에 숨고, 칼잡이는 칼 뒤에 숨는다.”고. 난 그게 싫다고. 감독은 영화 뒤에 숨어 있어야 돼. 근데 나는 영화 앞에 나서서 이러고 있는 거 아냐. (대폭소)    

사진 허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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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10.5.2)

2 thoughts on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준익 감독”

    1. 오~ 제 주변에서 또 보러 간다는 사람은 함장님이 처음이에요. ㅋ 근데 전 생각보다 영화가 나쁘지 않았거든요. 그럼 재밌게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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