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지>(Frenzy)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날은 그냥 일년 365일 중 하루일 테지만 영화계로 그 범위를 한정시킬 때 8월 13일은 우리의 세종대왕 님께서 태어난 날의 가치만큼이나 매우 임포턴트하며 히스토릭한 날이라 아니 할 수 엄따.

많은 영화감독들이 영화 참고서로 머릿속에 귀히 모시고 계신 ‘쑤릴러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탄생일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103년 전인 1899년 8월 13일, 히치콕은 이 세상에 자신의 첫 경적을 울렸더랬다. 응애~

근데 왜 100주년 땐 가마니 입 딱 씻고 있다가 이제서야 호들갑이냐고 의아해 할 독자덜도 있을 거라 본다. 잘 알잖어. 우리 이러는 거. 뭐 굳이 이유를 말해야 한다면, 그닥 대단치 않다. 왜냐면 그 때는 본 우원회가 별로 안 꼴렸는데 이번에는 꼴림의 에네르기가 세차게 발포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치콕의 영화를 한 편 소개하긴 해야겠는데 <사이코>라든지 <이창>,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와 같은 경우는 다 알고 있는 영화일테니 제껴두도록 하고, 본 우원은 이들 영화를 제외한 그의 50여 편에 달하는 영화의 제목이 담긴 구슬을 항아리에 넣고 하나를 초이스한 결과, 두두두두둥~ 그의 마지막 수작 <프렌지>가 선택되었다.

그런 전차로 본 우원회에서는 히치콕의 103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의 마지막 걸작 <프렌지>를 이번 달의 추억영화로 선정하는 바이다.


1.

그의 필모그라피 마지막 작품에서 세 번째에 해당하는 <토파즈 Topaz>의 흥행실패는 히치콕에게 생전 느껴보지 몬했던 존나게 커다란 절망감을 선사하였더랬다. 물론 그의 영화가 발표할 적마다 베리 굿한 성적을 거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가 뭐 신도 아닌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아무리 뭣같은 영화를 만들더라도(정말로 뭣같은 영화는 만들지 않았지만서도) 그를 추종하는 열광적인 팬과 비평가들은 히치콕 영화의 진가를 진정으로 이해해주었으며 화려한 빨아줌과 핥아줌을 비롯 온갖 체위의 애무로 최상의 평가를 내려주지 않았덩가.

게다가 비록 흥행실패라는 수치상의 꼬리표를 남기었을지언정 작품자체에 뻘건 신호등이 켜진 적은 엄었더랬따.

하지만 <토파즈>는 네버절대결코 그렇지 않았다. 히치콕의 지지자들마저 <토파즈>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은 흥행의 결과를 떠나 최고의 감독으로 추앙받던 그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차원의 문제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무디어진 칼날을 이전보다 더욱 날카롭고 곧게 세우는 것.

<프랜지 Frenzy>는 그러한 히치콕의 말못할 고뇌와 마지막이라는 똥줄 빠지는 긴장감이 만들어낸 영국 노신사의 최후의 만찬… 아니 역작이었고 그 결과 또한 똥줄뺀 만큼 흡족하였다.

뭣보다 <프랜지>는 <자마이카 인 Jamaica Inn> 이 후 그가 33년 만에 영국에서 ‘all’ 로케한 작품이었다(이전에 부분부분 영국에서 찍은 영화들은 많이 있었다). 그래서 히치콕은 고향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감회를 어떤 식으로든 표현해야만 했더랬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비록 <토파즈>라는 쒯 무비의 실패가 있긴 했지만서도 <레베카 Rebecca>에서부터 시작된 미국에서의 성공을 고국으로 가지고 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카메라가 런던의 상공을 당당당 훑으며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오는 <프랜지>의 도입부 장면은 자신의 금의환향에 대한 일종의 아크로바틱 셀프 똥고애무였던 셈이다.


2.

당 영화 <프랜지>의 내용은 간단하다. 넥타이 살인 사건의 혐의를 쓴 한 서서쏴가 간신히 누명을 벗는, 히치콕의 영화에서 많이 보아왔던 이야기다.

대신 히치콕은 당 영화에서 주인공이자 억세게 운이 없는 사나이인 블레이니(존 핀치 분)에게 살인혐의를 씌우는 과정에서 잼난 연출력을 보여준다. 관객이 주인공의 처지에 감정이 이입되도록 장치를 마련한 거다.

일단 두 장면을 바바라.

Notice!!
아랫부분부터 당 영화의 줄거리가 썰 풀어진다. 매우 결정적인 단서가 들가 있으니 당 영화를 아직 안 보았거나, 볼 예정인 잉간덜은 빠꾸 누질르시라! 괜히 후회하지 말고… 본 우원 경고했따!!

장면 1
강물에 뻘개 벗은 앉아쏴의 시체가 둥둥 떠내려온다. 죽은 앉아쏴의 모가지에 뭔가가 둘려져 있다. 목이 졸려 뒈진 것이다. 모가지 부분을 카메라가 다가가 비춰준다(close-up). 그것은 줄무늬 넥타이다.

장면 2
시체에 묶여져 있던 넥타이와 동일한 줄무늬 타이를 감고 있는 남자의 모가지가 거울을 통해 비춰진다. 카메라 뒤로 슬슬 꽁무니 뺀다. 그는 블레이니다.


이와 같은 장면을 통해 용의자가 밝혀지는 약 20분 동안 관객은 본연의 임무인 제3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목격(?)하게 된다. 그럼으로 관객 제위덜에게는 눈에 보이는 장면만이 진실이 된다. 히치콕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거다.

스크린에 비추어진 위 두 장면에서 본 바대로 살인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블레이니다. 사건현장의 그것과 동일한 넥타이를 매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의 두 장면이후 바로 나오는, 블레이니의 과격한 행동을 담은 에피소드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살인자임을 확신케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시야(?)가 좁아진 관객 제위의 입장에서라면 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실은 속고 있는 거다. 얼마 안 가 블레이니의 친구인 러스크(배리 포스터 분)가 실제 범인임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우리는 반전이라 부른다. 그럼으로써 블레이니는 혐의를 벗고 알리바이를 입증 받게 된다. 물론 관객에게 그리고 당 영화를 보는 니덜에게.

그렇다면 왜 히치콕은 그가 범인으로 보이게끔 오인하게 했을까? 간단하다. 누명쓴 서서쏴의 이야기가 당 영화의 주제인 관계로 관객덜도 오해의 과정을 겪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치콕은 관객을 영화 속 또 한 명의 인물로 끌어들인 것이다.

관객에게 실제 살인자가 밝혀짐과 동시에 이와는 반대로 극중에서는 블레이니가 살인자로 지목 받는다. 그가 살인현장에서 나오는 것을 피해자의 비서가 목격하였고, 살해당한 여자는 블레이니의 전(前) 부인이기 때문이다.

관객이 블레이니에게 보냈던 의심처럼 이제는 런던의 짭새가 블레이니에게 살인 혐의를 씌운다. 즉, 관객이 겪은 편견의 과정을 런던 짭새덜이 고스란히 옮겨 받는 셈이다.

잼나는 사실은 블레이니가 누명을 쓴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은 이제 그의 시점에서 영화를 보게된다는 점이다. 분명 관객은 그를 살인자로 모는 러스크에게 분개할 것이고, 또한 그를 범인으로 오인하는 짭새들에게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이를 우리는 고상한 용어를 빌려와 주인공에로의 동화 혹은 감정이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연출력의 장점은 관객을 단순히 영화보기라는 수동적인 상태로 패대기 치지 않고 극중으로 적극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로프 Rope>와 <사이코 Psycho>의 도입부를 기억하시능가? 브랜든과 필립이 데이비드를 살해하는 광경을(<로프>), 마리온과 샘의 불륜현장(<사이코>)을 우리는 카메라라는 ‘망원경’을 통해 창 뒤에서 은밀히 엿보기했다. 그 뿐인가, <이창 Rear Window>에서는 우리의 영화관람 행위를 쥔공 제프리의 훔쳐보기에 집약시킴으로써 관객을 졸찌에 관음증 환자로 몰고 가지 않았능가.

히치콕의 영화에서 관객은 더 이상 관객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처녀의 몸매를 훑어보는 음흉한 중년남성이 되고, 살인을 방조하는 방관자가 되며, 사건을 목격한 증인이 되어 영화에 출연(?)한다.


3.

<프랜지>에서 보여지는 또 한 개의 두드러진 특쥥은 히치콕이 쑤릴러라는 좡르의 개념을 한 번의 놀람이 아닌 긴장감의 연속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현기증 Vertigo>에서 마들레인(킴 노박 분)의 정체를 원작과는 달리 미리 드러냄으로써 반전의 깜딱놀람대신 지속적인 숴스펜수를 선택, 가장 모범적인 쑤릴러 영화의 답안지를 보여준 적이 있었더랬다.

블레이니와 러스크의 정체/관계가 일찍 밝혀지는 <프랜지>의 구성 역시 그런 히치콕의 성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

앞썰했듯, 당 영화는 <39계단 The 39 Steps>, <나는 고백하다 I Confess>, <다이얼 M을 돌려라 Dial M for Murder>,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North by Northwest> 등처럼 히치콕이 즐겨 사용한 누명 쓴 인물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다.

또한 <현기증>에서 보여주었던 숴스펜수 위주의 연출력, 원작소설을 히치콕 스똬일의 쑤릴러에 맞게 재구성했다는 점, 맥거핀과 같은 영화적 속임수가 극 초반부에 배치된 사실, 주위의 사물을 최대한 활용한 구성은 히치콕의 50여 편이 넘는 작품 활동을 통해서 증명된 전매특허이자 우수성의 단편들이었다.

그렇다면 당 영화는 히치콕의 공식을 잘 소화한 또 한 편의 히치콕 영화이다. 또한 동시에 히치콕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몇몇 두드러진 특징들의 결여는 전형적인 히치콕 영화라는 <프랜지>의 명제에 생소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39계단>의 로버트 도나트, <나는 고백하다>의 몽고메리 클리프트,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케리 그랜트까정 이들은 마빡 배우로써의 기본적인 흡인력뿐 아니라 누명 쓴 인물로 분했던 히치콕의 영화에서 부당한 처사를 받지만 언제나 관객의 동점심을 유발하는 쪽으로 극적 매력을 뚝뚝 흘리고 다녔더랬다.

<프랜지>의 블래이니, 존 핀치는 어떤가? 애초부터 그의 몽따는 히치콕 영화의 그것과는 잘 섞이지 않는다. 위에 언급한 서서쏴 배우덜처럼 먹어주게 생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따뜻한 느낌마저 결여되어 있다고 할까.

그런 전차로 블레이니는 히치콕 영화의 누명 쓴 인물이 관객으로부터 받아왔던 정당한 대가, 동정심/안타까움과 같은 일련의 감정을 끌어내지 몬 하고 있다.

특히 존나게 재수 없는 자신의 불행을 전 부인에게 싸대기 날려가며 화풀이하는 모습은 부정의 효과가 커서 히치콕 영화에서 종종 목격되는 오인 받은 인물들의 내면에 깔려있는 도덕적인 올바름과도 위배된다.

결국 관객은 감정이입이라는 측면에서 블레이니의 입장에는 동조하지만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게 된다 하겠다.

히치콕의 여성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미모의 금발 여배우가 당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히치콕의 영화와 거리가 있어 보이게 하는 큰 요소이다.

당 영화의 두 금발 여배우 바바라 리 헌트와 안나 매세이의 연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히치콕 영화에 나온 금발 여배우에게 연기력의 우수성 여부에 관해서 왈까왈부한 적은 드물었더랬다. 다만 관객은 살인 장면에서 품어져 나오는 숴스펜쑤의 쾌감(?)과 맞먹는 앉아쏴 배우덜의 야리야리얄라리한 매력이 영화 속에서 얼마나 빛을 발하는지에 더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4.

만약 당 영화가 히치콕 감독 활동의 초창기, 영국 시절에 만들어졌더라면 관객은 처음 접하는 낯선 느낌을 받지 않았을 거라 본다. 그 당시는 히치콕의 스똬일이 완성되어가고 있는 일종의 성장기였기 때문이다.

그의 쑤릴러가 확고히 굳어진 시기는 미국에서였다. 그리고 그 시절의 히치콕 영화에 관객은 너무나 익숙해져 있던 터였다.

그래서 <프랜지>는 전형적인 히치콕 스똬일이지만 그러면서 그의 붓칠이 결여 되어 있기도 한 이율배반적인 영화이다.


<딴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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