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낙 큰 영화들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작은 영화들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꽤 좋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이 찾지 않아 극장에서 일찍 내려가는 작품을 볼 때면 내가 관계자도 아닌데 안타까운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좋은 영화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기준 중의 하나는 지금 이 시대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포함하는 경우다. 요즘 관객은 메시지보다 단순한 유희에 더 반응하고 이에 따라 제작자들은 작품성보다 흥행에 직결하는 대중성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화 속 감독들의 개성이나 무엇보다 목소리가 줄어드는 이유다.
그렇다 보니 감독들은 우회하는 방식으로 은밀히 메시지를 숨겨놓는다. 최근 개봉작 중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하고 시장에서 너무 일찍 사라진 작품 중 이에 해당하는 영화가 이해영 감독의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하 ‘<경성학교>’)이었다.
<경성학교>는 일제강점기 시절,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된 경성의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 우울한 얼굴을 한 주란(박보영)이 전학 온다. 주란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모가 그녀를 기숙학교에 강제로 데려온 것이다. 뭔가 으스스한 학교 분위기와 교장(엄지원)이 주도하는 강압적인 환경에 주란은 불안을 느낀다.
정신도, 육체도 온전치 않은 그녀는 소녀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사건을 두 눈으로 목격한다. 이를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연덕(박소담)만이 주란을 감쌀 뿐이다. 학교는 여느 때처럼 우수학생을 선발해 도쿄로 보낸다는 목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수업을 강행한다. 그리고 연약했던 주란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괴력을 발휘한다.
영화계는 ‘특별한’ 소재 찾기에 혈안이 된 곳이다. 영화계에서 특별하다는 건 다르고 독창적이라는 표면적 의미보다 좀 복잡한 함의를 품고 있다. 영화 한 편에 워낙 거액이 들어가는 산업이다 보니 새로우면서도 보편적이고 대중적이면서 창작자의 안목도 두드러지는, 무엇보다 매니악한 소수보다 평범한 다수가 호응할 수 있는 이야기와 배경을 찾는 데 역량을 총동원한다.
쉽지 않은 작업인 만큼 매력적인 소재가 하나라도 발굴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드는 경향이 있다. 이를 우리는 유행 혹은 트렌드라고 부른다. 2007년과 2008년에 한국영화가 주목한 소재는 바로 ‘경성’이었다. 경성을 배경으로 한 <기담>(2007) <라듸오 데이즈> <원스 어폰 어 타임> <모던 보이>(이상 2008) 등의 영화가 줄을 이었고 TV에서는 <경성 스캔들>(2007)이 방영되기도 했다.
새로운 소재와 배경에 늘 목말라 있는 한국영화계에 경성은 한줄기 구원의 빛이 되어줄 것만 같았다.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관객은 일제강점기 경성 배경의 영화들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건 <경성학교>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을 터다.
<경성학교>의 원래 제목은 <소녀>이었다. 그 전에 최진성 감독의 <소녀>(2013)라는 동명 영화가 있었기에 이해영 감독이 원제를 밀어붙일지 아니면 변경할지, 바꾼다면 어떤 제목으로 할지 궁금했다. 제목이 <경성학교>로 정해졌다는 보도를 읽고는 촌스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부제로 붙은 ‘사라진 소녀들’이 진짜 제목다웠다. 상업적 성공에 목말랐던 탓일까, 이해영 감독이 제목을 덕지덕지 붙이는 시장 논리에 너무 따르는 건 아닌가, 염려도 들었다.
한편으로 경성을 내세운 제목에는 어떤 의도가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장사 마돈나>(2006) <페스티발>(2010) 등 전작들로 미루어 보건대 이해영 감독은 단순히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 작품성을 포기하는 연출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 경성인가? 일제 강점기의 경성을 2015년에 다시 소환한 이유는 무엇인가? <경성학교>는 이에 대한 논리를 갖추고 관객을 설득해야만 완성도를 갖는 영화다.
7~8년 전에 한국영화계가 경성에 주목했던 이유는 ‘모순’이었다. 박태원은 장편소설 <천변풍경>(1936)에서 당시의 경성을 묘사하길, ‘전차도 전차려니와, 웬 자동차며 자전거가 그렇게 쉴 새 없이 뒤를 이어서 달리느냐. 이층, 삼층, 사층 웬 집들이 이리 높고’라며 급변하는 현대화에 놀라움을 감추질 못했다.
반면 <경성기담>(2006)의 전봉관은 1940년대 경성을 무대로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사건을 이렇게 묘사했다. ‘두 남녀는 부인의 침실에서 밀회를 즐기다가 마리아에게 발견되었다. 다카하시 부인은 영원한 함구책으로 마리아를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이것을 이노우에와 상의했다.’ 1930~40년대 경성은 자동차와 마차가, 한복과 하이힐이, 양복과 상투가, 향락과 살육이, 무엇보다 이성과 비이성이 교차하는 모순의 시대였다.
이에 착안해 1942년의 경성이 배경인 <기담>은 아름답지만, 섬뜩한 사랑 이야기를 선보였다. <라듸오 데이즈>는 1930년대의 암울한 시대상 속에서 한국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의 좌충우돌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낙관주의를 선사했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은 1940년대 일제 치하에서 국가 유물을 손에 넣기 위한 독립군인지, 사기꾼인지 모를 주인공의 활약을 다뤘다. 1937년으로 간 <모던 보이>는 국가가 망하거나 말거나 사랑 찾기에 여념이 없는 철없는 모던 보이가 전면에 나섰다.
그중 <원스 어폰 어 타임>을 제외하면 이들 영화는 시대극이면서 개봉 당시의 현실과 접점을 마련하기 위한 복선을 어떻게든 깔아두었다. <기담>은 극 중 1979년이라는 ‘현재’ 시점에서 1942년을 되돌아보았다. <라듸오 데이즈>는 극 중 좌충우돌하는 드라마 제작의 설정을 빌려 경성 시대와 다르지 않은 부조리한 현대의 영화 산업을 풍자했다. <모던 보이>는 1937년이 배경이라고 해서 정확한 고증에 신경 쓰기보다는 창의적인 상상력을 가미해 당대의 관객이 전혀 낯설지 않은 비주얼을 완성했다.
이들 영화가 등장했던 2007년 말과 2008년은 정권 교체에 따른 그동안의 도덕과 상식에 대한 가치가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들어섰던 변곡점에 해당한다.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도덕과 상식 따위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다는 대중의 욕망은 이명박을 대통령의 자리에 앉혔다.
그때부터 우리 사회는 상식과 비상식, 도덕과 비도덕, 공정과 불공정 등의 선한 가치와 악한 가치가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대립하는 모순의 시대, 즉 또 다른 경성시대를 맞이했다. 이를 반영하듯 <기담>과 <라듸오 데이즈>와 <모던 보이> 등은 도덕과 상식의 이념과 가치가 뒤틀린 현재의 풍경을 일제 강점기의 경성이라는 전도된 시대로 우회하여 묘사했다.
그리고 2013년 정권이 바뀌었다. 여전히 보수 정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더 많은 돈을 벌겠다는 우리 사회의 욕망은 더욱 고약한 쪽으로 심화하였다. 상식보다 비상식이, 도덕보다 비도덕이, 공정보다 불공정이 주류의 가치가 되면서 전선의 양상은 다른 형태로 드러났다. 이미 시스템의 주도권을 장악한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없이 오히려 착취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안 그래도 기름진 배를 더욱 불려가고 있다.
다시 <경성학교>의 질문으로 돌아와, 왜 경성인가? 경성이 다시 소환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은 2007년 말 이후로 인권보다는 경제적 논리에 따른 반인권을, 약자보다는 강자를 옹호하는 근대적 가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닌 과거에 안주한 듯한 작금의 한국사회는 2000년대 후반을 수놓았던 경성 배경의 영화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결정적인 징후다.
1938년의 경성을 무대로 한 <경성학교>는 젊은 세대를 향한 기성세대의 악행을 학교라는 무대로 한정해 설명한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면서 시스템이 깊은 구석까지 빈틈없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선생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가 학생과 같은 젊은 세대를 억압하기에 안성맞춤인 구조다. 이것이 기존의 <소녀>라는 제목 대신 <경성학교>를 내세운 배경일 터다.
주란이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기숙학교에 들이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자 돌아오는 건 사감의 따귀다. 사소한 의견조차 용납되지 않은 경성학교에서 주란을 비롯한 학생들은 ‘여자’ 교장의 주도하에 철저하게 길러진다. 일본식 교육에 맞춰 정신을 개조하고 학교 측에서 준비한 음식과 인체 실험으로 몸을 개조한다. 여기에 1등 한 학생만이 지옥 같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경쟁 시스템을 도입해 학생들의 자유의지마저 박탈한다. 이에 낙오하거나 반항하는 이들의 운명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다. ‘사라진 소녀’가 <경성학교>의 부제로 채택된 이유다.
그렇다면 사라진 이들은 행방은? 경성학교에서 주란을 이해하는 친구는 연덕이 유일하다. 주란과 연덕은 종종 학교의 감시를 피해 숲 속 깊숙한 곳의 연못으로 놀러 간다. 이곳에서 함께 보트를 타던 주란은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일부러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때 주란이 물속에서 보게 되는 이미지는 수장된 수십 명의 소녀다. 이 장면이 겨냥하는 것은 ‘세월호’다.
수백 명의 꽃다운 소녀와 소년을 죽음으로 내몬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남긴 충격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국가가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불신, 그런 국가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그와 같은 사고를 예방하기는커녕 더 큰 재앙으로 키운 무능력이 2015년을 지배하고 있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사지로 내몰면 결국 잃게 되는 건 우리 모두의 미래다. <경성학교>에서도 교장을 내세운 국가 권력에 의해 인간병기로 개조된 주란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들에게 복수를 행한다. 그럼으로써 유일하게 살아남은 주란은 더 나은 미래를 이끌 것인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주란에게 남은 건 슬픔과 끝 모를 패배감뿐이다.
이것이 어디 주란에게만 해당할까. 지금 우리의 청춘들은 기성세대가 판을 짜놓은 무한 경쟁 시대 속에 일자리를 얻지 못해, 결혼하지 못해, 출산하지 못해, 그 과정에서 떠안게 된 고액의 빚을 갚지 못해 사회 속에서 사라진 존재로 전락했다. 이에 대한 해결 의지가 기성세대에게 전혀 없는 상황에서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 환경이 <경성학교>를 외면한 사회적 배경으로 작용했을 터다. 분명한 건, 7~8년 전 경성 배경의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2015년에 만나는 경성 또한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ARENA HOMME
2015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