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의 집(과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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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은 15년 만에 찾아온 서연(한가인)의 의뢰를 받고 건축가인 승민(엄태웅)이 제주도에 집을 짓는 영화다. 안 그래도 영화는 폐허처럼 방치된 집을 거니는 어른 서연을 모습을 비추며 오프닝을 연다. 그렇다고 저절로 집이 만들어지나. “사람을 알아야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극 중 대사처럼 승민은 귀찮을 정도로 서연의 의도를 캐묻기 시작한다.

서연이 집을 새로 짓는 이유는 승민을 찾아온 이유와도 깊은 연관을 맺는다. 그래서 극 중 집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던 대학시절의 승민(이제훈)과 서연(배수지)이 헤어지게 된 사연의 ‘복원'(서연이 의뢰한 집은 과거 아빠와 살던 집의 리모델링이다!)과도 궤를 함께 한다. 그에 따라 영화는 15년의 시간을 오가며 이 둘의 흩어진 기억의 파편을 한 데 모아 차곡차곡 집을 쌓아올리고 그 안에 사연을 들이게 되니, 이때 가장 극적인 의미를 품은 미장센이 바로 ‘피아노’다.

(스포일러 주의! 책임 못짐!!) 음대생 서연이 건축학개론을 듣는 이유는 방송동아리 소속의 건축학과 남자 선배 재욱(유연석) 때문이다. 강남 출신이고 외모도 출중한데다 집안에 돈도 많은 재욱은 저 먼 제주도에서 어렵게 피아노를 배워 음대에 입학한 서연에게는 흠모의 대상이다. 학원 출신이라고 놀려대는 같은 과 친구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피아노는 포기한 지 오래. 대신 아나운서가 되어 그들의 자존심을 꺾고 싶지만 아빠는 재능을 썩힌다며 안타까워하고 서연은 그런 아빠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사실 서연은 새 집을 지으면서 피아노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대학시절 그녀의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졸업 후 의사 남편을 만나 팔자를 고치나 했지만 결혼에도 실패한 까닭에 더더욱 피아노를 집 안에 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게 됐다. (서연 왈, “씨발 왜 이렇게 좃같니!”) 하지만 병상에 누운 아버지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면서 서연의 마음은 흔들리고 만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피아노 치는 딸의 모습을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제주도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즉, 첫사랑 승민은 이제는 속물이 된 서연에게 순수의 시절을 회복해줄 존재다. (그녀가 굳이 승민을 15년 만에 찾아온 이유!) 이미 결혼 상대가 있는 승민과 다시 맺어질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가 집을 설계해줌으로써 집안에는 또한 그와의 추억이 곳곳에 배어들어갈 것임은 자명하다. 예컨대, 집을 만드는 초기만 해도 서연의 요구에 따라 피아노가 들어갈 방이 없었지만 그녀가 마음을 바꾸면서 고집불통의 승민을 설득, 집 구조는 단층에서 피아노가 들어갈 만한 규모의 복층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피아노(가 놓인 새 집)은 아빠와의 추억이면서 또한 앞으로 승민과의 추억이 되는 것이다.

건축은 집을 만들기 이전 사람을 탐구하는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집은 건축주의 사연이 퇴적층처럼 쌓여 생명을 부여받게 된다. (영화와 건축이 닮았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집 뿐만 아니라 집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에 적용되는 전제다. 마르지 않은 시멘트 위에 새겨진 아가 시절 서연의 발바닥 모양, 서연이 재욱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줄로 오해하고 분에 못 이겨 승민이 발로 차 찌그러뜨린 집 대문의 일부, 그리고 서연과 승민의 순수를 간직한 집과 피아노. 사람은 건물에 사연을 남기고 건물은 인간의 소소한 역사를 온몸으로 기록한다. <건축학개론>은 건축학을 빌린 첫사랑에 대한 오래 기억될 영화다. 

3 thoughts on “<건축학개론>의 집(과 피아노)”

  1. 90년대 기억에 참 흐뭇했어요. 게다가 제가 살고 싶은 동네와 집이 나란히 나와서 신기신기. 정릉동 한옥집과 제주 바다가 내다보이는 일층집…

    1. 드디어 보셨군요 ^^ 90년대 학번들이 특히 좋아한다고 하네요. 제주도 그 집은 안 없애고 명필름에서 시나리오 쓰는 공간으로 활용한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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