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따뜻한 색, 블루>(La vie d’Adele : Chapitres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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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압델라티프 케시시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는 프랑스 출신의 쥘리 마로의 만화 <파란색은 따뜻하다 Le bleu est une couleur chaude>를 원작으로 한다. 다만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원작 만화 간의 접점은 여고생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이 이성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던 중 예술가를 꿈꾸는 파란 머리의 엠마(레아 세이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만 유효하다.

원작자 쥘리 마로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얼마나 차가운지 그로 인한 주인공(만화에서는 아델이 아니라 클레망틴이다!)의 비극을 결말로 가져간다. 대신 역설(逆說)을 품은 제목은 파란색이 품고 있는 선입견을 뒤집어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力說)하는 것이다. 그와 다르게 압델라티프 케시시가 묘사하는 극 중 동성애는 일상적인 것에 가깝다. 엠마의 정체성을 목격한 친구들이 비난을 퍼붓기는 하지만 극심한 저항에 부딪히지는 않는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이지만 튀니지 출신인 압델라티프 케시시가 원작의 클레망틴이란 이름을 포기하고 아델을 가져온 건 아랍어로 ‘정의’를 뜻하기 때문이다. 사랑 이야기에 뜬금없이 정의라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원작이나 영화의 텍스트에서 ‘블루’는 가장 상징적일 수밖에 없는데 압델라티프 케시시는 이에서 프랑스가 국가적으로 수호하는 가치를 본다. 프랑스의 국기는 삼색으로 이뤄져있는데 그중 블루가 의미하는 자유라는 정의를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쥘리 마로의 원작을 영화로 옮길 때 가장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연출의 방법론은 이미지를 통한 블루의 재현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도 블루의 이미지는 매 장면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블루에 강조점을 두기보다는 평소에 입는 옷, 길가의 담벼락, 방안의 커튼이나 침대보처럼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형태로 묘사된다. 압델라티프 케시시가 보기에 원작 만화와 다르게 프랑스 사회에서 동성애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랑의 한 형태다.
 
주목할 건 그와 같은 자유가 처음부터 주어진 건 아니라는 점이다. 프랑스가 국기에 그 의미를 부여할 정도로 자유를 부각하는 건 그것이 피를 흘린 투쟁으로 쟁취됐기 때문이다. (극 중 민영화에 반대하는 시위대의 묘사가 등장한다!) 국가는 그러면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인데 삶 또한 마찬가지다. 삶은 자신이 원하는 것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벌이는 투쟁의 과정이라 할 만하다. 다시 말해,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아델의 투쟁기에 다름 아니다. 강조컨대, 아델이 얻고자 하는 건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얻어야 할 동성애의 자유가 아닌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사랑은 변덕이 심해서 어느 순간 변하기 마련이다. 변화무쌍한 사랑을 자신의 의지대로 잡아두기 위해서는 늘 투쟁해야 한다. 이 영화의 파격적인 정사씬, 아델과 엠마의 섹스는 높은 수위에도 불구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가 사랑을 얻기 위해 벌이는 투쟁처럼 다소 거친 행위로 묘사된다. 이때 성취욕이 더 큰 쪽은 바로 아델이다. 엠마는 아델 이전 사귀는 사람이 있었던 것에 반해 아델에게는 엠마가 첫사랑이기 때문이다.  

국내 제목은 원작 만화의 원제를 그대로 따르지만 영화의 원제는 다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아니라 <아델의 이야기 1부와 2부 La vie d’Adele : Chapitres 1&2>다. (국내에 최초 상영됐던 부산영화제에서는 이 제목을 그대로 따랐다!) 1부와 2부로 표기가 되어 있지만 영화는 그렇게 챕터로 나뉘어져 구성된 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압델라티프 케시시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인간의 생을 10으로 보는데 이 영화가 다루는 아델의 삶은 1과 2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아델은 영화 초반에 학생으로 묘사되지만 중반을 넘어서면 유치원생을 가르치는 교사, 즉 사회 초년생이 되어 있다. 이를 단서로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다루는 아델의 나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로 추정된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나이일 뿐더러 사랑을 알면 또 얼마나 알겠는가. 아델의 경우처럼 그 나이 대의 청년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다가도 유난히 심한 이별의 아픔을 겪기도 한다. 우리는 이를 상실이 아닌 ‘성장통’이라고 부른다.

엠마를 만나기 전까지 아델은 여자라기보다는 아직 철이 덜 든 소녀의 형태다. 입을 멍하니 벌리는 경우가 많고 채신머리없게 엉덩이 골에 낄 때까지 바지를 추켜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엠마와의 사랑과 이별을 경험한 후의 아델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눈에 반할 정도의 여신 급 미모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델은 파란 원피스를 입고 있는 데 일련의 경험을 통해 성장을 획득한 그녀의 상태를 은유한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비록 거기서 끝을 맺지만 아델이 앞으로 새로운 사랑을 만나 또 다른 성장을 이룰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녀는 고작 1과 2의 과정을 거쳤고 10까지는 아직도 8의 삶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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