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멜로가 보고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소개팅 제의가 심심찮게 들어온다. 워낙 즉석만남 같은 거에 관심 없이 지내온 지 오래라 거절하기 일쑤지만 동성친구가 술 약속을 빌미로 예고도 없이 이성을 데리고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더러 마음에 맞는 이성이 나오는 때도 있지만 대개는 매력을 찾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럴 때면 사실 자리를 일찍 뜨고 싶지만 나를 생각해준 친구의 체면도 있고 해서 형식적이지만 그날 하루만큼은 여느 남녀커플처럼 데이트를 즐기는 편이다. 뭐, 별 거 없다. 커피 한 잔 마시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후 저녁을 먹고는 헤어진다. 물론 전화번호를 교환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연락을 하는 경우는 없다.

여기에 내 소개팅 전력을 쓸 의도는 아니고, (그렇게 많이 하지도 않았다. 그냥 손에 꼽을 정도…….) 다만 얼마 전에 본의 아니게 소개팅을 한 후 겪었던 조금 난감했던 경우를 소개할 생각이다. 소개팅 얘기인 것 같지만 실은 영화에 대한 얘기다. 더 정확히는 가을에 남녀커플이 볼만한 멜로영화가 없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소개받은 여자와 커피를 마신 후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보자는 심산에 영화 한 편을 보러 멀티플렉스 극장에를 가게 됐다. 상영영화를 소개하는 매표대 위의 모니터에서는 블록버스터 시즌이 지났는데도 한창 흥행몰이 중인 영화가 소개되고 있었다. 액션영화 <최종병기 활>도 있었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도 있었고 공포영화 <블라인드>도 있었고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도 있었지만 상대방 여자는 쉽게 선택하지를 못했다.

나는 농담처럼 “이 영화들이 다 보고 싶은 가 봐요” 물어본 후 속으로 아차 싶었다. 정말로 몇 편 보고 싶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럼 더 오랫동안 같이 있어야 하나. 쓸 데 없는 고민하기를 잠시, 여자는 다소 기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멜로영화를 보고 싶거든요” “그럼 가까운 극장으로 가볼까요? (아차!)” “괜찮으세요?” 사실 하나도 안 괜찮았지만 “그럼요, 시간 많은데요, 뭘 (왜 이런 맘에도 없는 말을!)” 그러고 보니 나도 오랜만에 멜로영화가 당겼다. 최근에 본 영화들이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은 이미 모두 본 상태였다) 작품의 질은 뛰어났지만 볼거리가 현란하고 인간의 미래에 대해 비극적이고 심장을 자극하고 메시지가 강렬해서 이를 순화해줄 달달한 멜로영화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원하는 멜로영화를 보고 그렇게 헤어졌다, 고 예상하시겠지만 실은 옮겨간 극장에서도 멜로영화를 볼 수 없었다. 역시나 흥행이 되는 자극적인 영화들 위주로 상영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대신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겨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에 대한 관등성명을 모두 마친 이후라,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호감도 별로 못 느끼고 있던 상태라 무슨 이야기를 더할까 싶었지만 예상외로 우리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가 영화에 대한 흥미 있는 주제를 툭 던졌기 때문이다. “요즘엔 한국 멜로영화를 보기가 너무 힘들어졌어요. 그렇지 않아요? 가을에 멜로영화 보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데”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생각하다 보니 올해 내가 본 멜로영화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일 때문에 <8월의 크리스마스>나 <봄날은 간다> 같은 작품은 보았지만 개봉영화 중에서 본 멜로영화는 김태용 감독의 <만추>가 유일했다. 개인적으로는 흥미롭게 보았지만 (탕웨이 너무 예쁘다) <만추>의 흥행은 생각 외로 저조해서 전국 100만 관객을 간신히 넘겼던 것으로 기억된다. 개봉 당시 현빈이 출연했던 TV드라마 <시크릿 가든>이 기록적인 흥행을 기록하며 그 기세를 몰아 <만추>의 개봉이 확정됐지만 브라운관 앞의 시청자를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했던 것이다. 나는 “김태용 감독이 예술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인식돼서 관객들이 지레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추>를 외면한 것 같아요. 흠흠” 전문가인양 거침없이 분석을 쏟아냈다.

그녀는 나의 화려한 분석에 감탄하기는커녕 심드렁한 표정으로 “세상이 너무 각박해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국내 감독들이 멜로영화를 안 만들겠죠. 사랑 없는 세상은 너무 건조하지 않아요?” 순간 뒤통수가 쿵! 역시나 영화업에 종사하는 사람과 일반 관객이 생각하는 차이는 이렇게 크단 말인가! 안 그래도 한국 영화시장에서의 멜로영화는 몇 년 전부터 장사가 안 되는 장르로 낙인(?)찍힌 상태다. 2006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전국 313만 명을 기록하며 가을 멜로의 정점을 찍은 후 한국 영화시장에서 멜로영화는 급속도로 사라져갔다. 올 가을 시장만 해도 권상우, 정려원 주연의 <통증>이 유일하게 가을 멜로라는 정통성을 잇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그럴싸한 분석을 제시한다. 멜로영화의 특성상 스타배우의 출연은 필수인데 워낙 블록버스터 급 영화에만 관심을 가지다보니 캐스팅이 어렵고 그에 따라 배우의 인지도를 투자의 바로미터로 삼는 투자자들로부터 제작비를 유치하기도 힘들어지고 그 같은 결과로 멜로영화 자체가 씨가 말라간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 서있는 그녀의 생각은 좀 달라 보였다. 한마디로 동시대의 감각과 동떨어진 멜로영화들만 있다 보니 관객들이 안 찾는 것이지 자신 같은 사람들은 소통할 수 있는 멜로영화에 굶주려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통증>의 경우만 하더라도 강풀 작가의 원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와 통증이 치명적인 여자의 사랑이라는 설정이 이목을 끌긴 하지만 영화 자체는 비현실적이라 감정이입을 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녀의 주장처럼 2~3년 새 개봉했던 멜로영화를 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으로 관객의 외면을 샀던 경우가 많았다. 한 여자가 두 남자와 결혼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의 <아내가 결혼했다>(2008)가 그랬고 온 몸이 굳어가는 병을 가진 남자와 끝까지 병실을 지키는 지고지순한 여자라는 다소 특수한 상황의 사랑을 그린 <내 사랑 내 곁에>(2009)가 그랬다. (그리고 2010년에는 가을 멜로영화라고 할 만한 작품이 단 한 편도 개봉하지 않았다!) 지금 젊은 세대들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지, 그들이 어떤 갈등과 고민을 가지고 사랑에 성공(혹은 실패)하는지에 대한 동시대의 멜로영화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물론 지금 한국시장이 검증된 흥행력을 바탕으로 규모만 키울 줄 알았지 비슷한 모양새의 ‘상품’을 만들고 있는 까닭에 동시대를 느낄 수 있는 영화 자체를 기대하는 것이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그녀는 굳이 현실을 반영한 멜로는 아닐지라도 희망을 품고 있는 영화를 봤으면 하는 의견을 피력했다. 사랑은 일상적인 것인데 간혹 나오는 멜로영화의 주인공들은 왜 만날 죽던가, 헤어지는 등의 비극적인 형태로 끝을 맺느냐는 거다. “사랑을 찾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소개팅에 나오게 된 거고요.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사랑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은 만들어가는 거잖아요. 사랑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이 세상 살기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현실도 힘든데 극장에서도 영화의 주인공들이 힘들어하는 꼴 보기는 싫거든요. 희망을 얻고 싶어요. 그냥 가벼운 로맨틱코미디 영화라도 개봉했으면 좋겠어요. 할리우드 거는 우리 정서랑 안 맞으니까 한국 걸로요“  

상황이 이쯤 되면 관심 없던 그녀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좀 더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전화번호 알아내는 데도 성공! 이번 주말에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 없으면 DVD방에 가서 <미술관 옆 동물원>(1998) 같은 한국 멜로영화 한 편 보자고 애프터 신청해야겠다. 근데 1분, 10분, 1시간, 하루가 가도 상대방에게서 답변이 오지 않는다. 이건 뭐 전화도 안 받고 말이야. 그럼 그렇지, 내 주제에 여자는 무슨. 가을 멜로영화 보기 전에 여자 친구 먼저 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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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NA
2011년 10월호

8 thoughts on “가을의 멜로가 보고 싶다”

  1. 태그센스에서 빠앙~~ㅋㅋㅋ 오직 그대만. 보고 싶어지네요. 근데 꽃섬 감독 영화라니 말랑말랑은 아닐 것 같고 어떤 멜로일지 궁금하네요. 아~ 매일매일 날씨가 좋아요!!

  2. 저도 송일곤 감독 영화 좋아해요 특히 < 마법사들> 좋아하는데 전 되려 < 오직 그대만>은 말랑말랑 할 것 같아서 싫어요 ^^; 소지섭은 왜 다리를 절어도 멋있눈 거야 된장!

  3. 쭉 읽어나가다가 오오 잘 맞으실 것 같은데 연락 한번 해보시지…라고 생각했다가, 마지막 문단 보고 ㅋㅋ. 그런데 어디까지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건가요? ㅎㅎ
    어찌되었든 여자 친구 구하는데 성공하시길. ^^

    저는 멜로 영화를 딱히 좋아하진 않는지라 별로 아쉽진 않지만, 현실에서의 멜로는 아쉽네요. ㅋㅋ 스크린에서 보기보단 현실에서 경험하고 싶은. 어흐흑…

허남웅에게 댓글 남기기 댓글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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