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더이상 멜로의 계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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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가 되면 많은 언론이 영화계에 제기하는 뻔한 레퍼토리가 있다. 멜로영화의 흥행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가을은 멜로의 계절’이라는 선입견을 적용해 개봉작을 살펴보니 눈이 가는 작품이 별로 없고 기간을 올해 초까지 확장해보니 흥행에 성공한 멜로영화도 없기 때문에 나온 지적이다. 이게 왜 뻔한 문제 제기냐 하면, 올해만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특정 시기가 흥행을 보장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특정 시기를 겨냥해 만들어지는 장르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여름에는 더위를 타는 관객을 오싹하게 만들자는 취지(?)에서 공포영화가 성행했다. 가을에는 멜로영화였다. 단풍잎 떨어지는 길이 연상되는 가을은 사람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로맨스를 다룰 적기라는 풍토가 있었다.

다양성의 가치가 많이 떨어진 요즘에는 그런 공식 아닌 공식이 깨진 지 오래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집중되는 성수기와 다양한 영화들이 혼재하는 비수기 정도로 나뉘는 게 보통이다. 이것도 외형상으로 그렇지 특정 시기에 관계없이 될 영화는 되고 안될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는 것이 지금의 극장가 풍경이다.

예컨대, 대표적인 블록버스터 시리즈 <어벤져스>(2012)와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과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는 모두 비수기로 통하는 4월에 개봉해 적게는 700만, 많게는 1,000만 명까지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 올해 공포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200만)을 동원한 제임스 완 감독의 <컨저링2>는 9월에 개봉하며 공포물은 여름이라는 공식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영화가 산업이 되고 멀티플렉스로 극장가의 질서가 재편되면서 최대한 많은 스크린을 확보하는 것이 영화 배급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주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블록버스터의 경우, 블록버스터끼리의 맞대결을 피해 개봉일을 확정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화려한 볼거리를 갖추지 못했거나 월등히 재미난 이야기를 어필하지 못하는 저예산 영화의 경우, 극장을 잡기도 힘들뿐더러 스크린을 확보해도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는 것이 힘든 상황이다. 멜로영화가 언제부턴가 힘을 못 쓰는 배경은 바로 이와 같은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멜로영화는 생각보다 만들기 어렵다

멜로영화는 블록버스터와는 먼 성격의 장르다. 사건이 중요한 블록버스터와 다르게 멜로영화는 심리 묘사가 이야기의 성패를 좌우한다. 스펙터클로 관객의 눈을 현혹하는 데에도 제한적이라 배우의 외모나 특색 있는 배경 정도가 볼거리로 기능한다. 요컨대, 멜로물은 이야기가 새롭거나 탄탄하지 않으면 흥행에 딱 실패하기 쉬운 구조다. 올 상반기 개봉했던 <나를 잊지 말아요>와 <남과 여>가 각각 정우성과 김하늘, 전도연과 공유 등 최고의 흥행 남녀 배우를 캐스팅했음에도 채 50만 명도 기록하지 못한 배경이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자식 잃은 젊은 부부의 화해와 사랑을 철 지난 신파로 무리하게 밀어붙이면서 참패를 기록했다. <남과 여>는 저 먼 핀란드까지 날아가 아름다운 설원을 배경으로 했지만, 각자의 배우자가 있는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을 기존 제도에 순응하는 뻔한 결말로 가져가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다.

반면 재개봉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쓴 할리우드 영화 <이터널 선샤인>과 <노트북>은 오히려 개봉 당시보다 더 많은 관객을 모은 것이 이채롭다. <이터널 선샤인>은 이별한 남녀가 연애 동안의 기억을 삭제한다는 SF적 설정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모았고, <노트북>은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로 눈물샘을 자극하며 한국 멜로영화가 흥행에서 실패한 지점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그러니까, 한국 멜로영화가 흥행에서 부진할 뿐 아니라 잘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워낙 정치 사회 이슈가 많이 터지는 데다, 경제 불황의 어두운 터널마저 앞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은 그럴싸해 보일지는 몰라도 적확한 분석은 아닌 셈이다.

멜로영화는 보기와 다르게 이야기를 짜기가 꽤 힘들다.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지만, 관객들이 이를 특별하게 인식하게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멜로물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영화가 관객들의 용이한 감정이입을 위해 극 중에 멜로 라인을 장착하는 게 보통이라 로맨스 하나만으로 승부를 보려는 영화들은 웬만한 이야기로는 본전도 찾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11월에 개봉했거나 개봉 중인 멜로 관련 영화들은 장르를 굳이 로맨스 하나로 확정하지 않는다.

성인 멜로? 판타지 로맨스? 로맨틱 코미디?

김승우, 이태란 주연의 <두 번째 스물>은 그냥 멜로가 아니다. ’성인’ 멜로다. 스물 나이에 스물이 더해진 마흔 살에 옛 연인과 우연히 만나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다시금 사랑하는 내용이다. ‘성인’용으로 차별을 시도했지만, 짧은 내용 요약에서부터 새롭기는커녕 뻔한 냄새가 진동한다. 아니나 달라, 개봉과 함께 소리 소문도 없이 극장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강동원의 출연으로 흥행을 이미 예약한 <가려진 시간>은 ‘판타지’ 로맨스다. 아이들끼리 함께 공사장 발파 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산으로 갔다가 모두 실종되고 수린(신은수)만 유일하게 돌아온다. 며칠 후, 실종된 아이 중 성민(강동원)이 성인이 되어 나타나 수린과 재회하고 주변 어른들의 편견에 맞선다. <가려진 시간>은 사실 로맨스보다는 실종된 아이들이 ‘멈춰진 시간’에 존재하는 판타지에 더 방점을 찍은 영화다. 무엇보다 성인이 되어 돌아온 성민과 중학생 수린의 관계는 로맨스이되 성적인 느낌은 완전히 거세된 순수 판타지 쪽에 가깝다.

<사랑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는 차태현과 김유정이다. 기억을 잃은 작곡가가 사랑에 서툰 사람들의 몸을 갈아타며 벌어지는 코믹 소동극이다 보니 극 중 차태현과 김유정의 관계도 <가려진 시간>처럼 우리가 상상하는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이런 식이다. <두 번째 스물>과 <가려진 시간>과 <사랑하기 때문에>는 개봉하는 시기가 가을이다 보니 홍보 차원에서 멜로를 전면에 내세운다. <두 번째 스물>을 제외하면 로맨스는 거들뿐 색다른 이야기와 소재는 판타지와 코미디로 무게중심이 넘어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려진 시간>과 <사랑하기 때문에>가 흥행에 성공할 경우, 이를 두고 ‘로맨스 영화의 부활’이라고 의미 부여할 수 있을까? 매년 되풀이되는 ‘멜로영화의 흥행 예전 같지 않다’는 종류의 기사를 보면 뭔들 안 나올까 싶다. 영화 시장의 패러다임은 이미 바뀐 지 오래다. ‘가을은 멜로의 계절’과 같은 낭만적인 공식도 유효 기간이 벌써 지났다. 그에 맞춰 기사들도 바뀌어야 한다.

 

시사저널
(2016.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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