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V] <문라이트>

(생각을 정리하려고 마구 써내려간 글이라 문장이 둔탁하고 오타도 많을 거예요. 언제나처럼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

먼저, 이 영화의 제목인 ‘문라이트’가 과연 영화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알려진 사실대로 <문라이트>는 각본가 타렐 알빈 맥크래니가 연극 학교에서 과제로 낸 작품 ‘달빛 아래에 흑은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를 확장했다고 하죠. 연극은 소년과 청년 시절을 다뤘을 뿐인데 영화는 여기에 성년 시절을 더했고, 뒤에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아예 극 중 주인공의 생과 또 다른 생의 시작을 다루고 있습니다.

극 중 주인공의 생은 명보다는 암이 많죠. 불안정한 엄마의 상태, 주인공을 괴롭히는 학우들 등과 같은 인생의 어둠을 비추는 건 비밀스러운 사랑입니다. 어둠으로 쌓인 그의 인생이 아주 엉망이 되지 않은 건 한줄기 달빛과 같은 인생을 다잡아줄 어떤 동력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비록 청소년 시절 자신을 괴롭히는 학우에 대한 폭력으로 감옥에 갔다 와 마약상으로 일했지만, 인간 실격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을 보고 있으면 감동 비슷한 것이 느껴져요. 무너질 수도 있는 삶이었는데 사랑과 그를 괴롭힌 배경에 이 악물고 지지 않겠다며 잡아 놓은 삶의 기준 때문이었겠죠.

이 영화에는 (달)빛의 시점으로 추정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달을 비춰주는 장면은 블랙이 케빈과 관계를 완성하는 마지막 부분에 한 번 등장합니다!) 영화는 소년 시절을 ‘리틀’(알렉 히버트), 청소년 시절을 ‘샤이론’(애쉬튼 샌더스), 성인 시절을 ‘블랙’(드레반트 로즈)으로 하여 한 인물의 성장기를 보여주는데 언급한 시점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샤이론입니다. 샤이론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케빈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죠. 그날은 언제나처럼 샤이론이 기분이 안 좋은 날이었죠. 역시나 엄마 폴라(나오미 해리스)는 약에 절어 있었고요. 무엇보다 케빈이 학교 여자와 섹스를 했다는 얘기를 해서 특히 기분이 안좋습니다. 꿈까지 꿨을 정도니까요.

기분이 안 좋은 상황에서 해변에 나와보니 케빈이 있어요. 그때 둘은 첫 키스를 나누죠. 샤이론에게는 마음에 둔 이와 나눈 첫 번째 스킨쉽이었습니다. 이때 카메라는 이 둘을 부감으로 잡는데요. 이 영화의 제목이 의미하는 ‘문라이트’는 샤이론이 케빈과의 사랑을, 특히 샤이론이 이날의 접촉을 평생의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며 살아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달빛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화장실의 인공 빛에서 내려보는 듯한 구도의 장면인데요. 이 또한, 샤이론의 장면에서 등장해요. 학교에서 꾀임에 빠진 케빈에게 샤이론이 폭행을 당한 날, 피멍이 든 얼굴을 얼음을 가득 채운 세면대에서 식히는 장면입니다. 케빈으로 하여금 샤이론에게 상처를 준 고약한 운명을 이겨보겠다는 의지를 상징하는데요. 이 장면 이후 샤이론은 자신을 괴롭힌 이에게 복수를 하고 감옥에 가게 되죠. 그리고 세월이 흘러 블랙이 되는데 샤이론 에피소드에서의 세면대 장면이 다시 활용이 됩니다. 그 전에 강한 의지를 묘사하는 장면이었다면 지금은 냉점함의 표현이겠죠. 그렇게 변화한 자기방어를 가지고 성년이 된 것이고요.

케빈과의 사랑이 긍정적인 의미의 달빛이었다면, 주변의 괴롭힘은 샤이론이 살아가는 데 깡다구를 심어준, 어떻게 보면 부정적인 상황을 오히려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바꿔준 것입니다. 무엇보다 후안(마허샬라 알리)의 존재가 중요한데요. 후안은 친구들의 폭력에 도망치다 마약 소굴에 들어온 리틀을 구해줍니다. 그에 더해 집에 가지 못하는 사정을 알고는 먹을 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어떤 면에서 보면 유사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맡았습니다.

후안의 역할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문라이트>에서 블랙 이후 부재한 성장의 시기를 부여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 영화는 리틀과 샤이론과 블랙 세 에피소드로 진행이 됩니다. 각 이름의 배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죠. 근데 유독 리틀 부분에서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건 후안입니다. 후안은 아빠가 없는 리틀의 아빠 역할을 해주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블랙으로 마무리 되는 이 영화의 블랙 이후 나이대의 삶을 보여주는 역할이기도 합니다. 감옥에서 출소해 마약상이 된 블랙은 리틀 시절 따랐던 후안처럼 이빨에 금 액세서리를 부착하고 차에는 왕관 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에피소드를 할애하지 않지만, <문라이트>가 리틀->샤이론->블랙->후안의 구도로 한 인물이 성장한다는 걸 보여주죠.

레이어를 더하는 건 이뿐이 아닙니다. 후안은 죽을 운명의 인물이죠. 그의 죽음은 샤이론 에피소드에서 대사로 언급됩니다. 말하자면 후안은 곧 유령이 될 인물입니다. 근데 이 영화는 블랙의 마지막 장면에 리틀을 배치합니다. 리틀은 특정 이름이라기보다 어린 시절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또 다른 흑인의 삶으로 흑인의 다양한 삶을 유추토록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배치된 리틀의 삶이 그 전 리틀과 달라진다면 후안과 같은 존재가 자신이 경험했던 삶의 노하우를 알려준 결과이기도 하겠죠. 부러 해변으로 데리고 나가 거친 물살을 헤치며 수영을 할 수 있도록 후안이 리틀에게 가르쳐 주는 장면은 삶을 헤쳐나가는 법에 대한 가르침일 거예요. 죽음이 예정된 후안이 그 자신과 같은 흑인이면서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를 위해 나침반 역할을 해주는 것이죠.

<문라이트>의 첫 장면은 흥미로워요. 후안이 마약을 파는 동네에 와서 그의 곁으로 도망치는 리틀이 등장하기까지 3~4분의 장면을 원테이크 원씬으로 잡아요. 이들의 삶이 하나로 묶인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나서 친구들의 괴롭힘을 피해 창문을 나무로 가려놓은 방에 숨어 있던 리틀을 향해 후안이 옵니다. 이때 후안은 창문을 가려놓은 나무를 떼어내는데요. 그때의 구도는 리틀과 후안이 나무가 떨어져 나간 창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는 구도입니다. 마치 서로 거울을 보는 인상데요. 유령 후안이 자신이기도 했던 리틀을 찾아와 자신과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 있겠죠.

어떻게? 후안은 리틀에게 밥을 사주며 마약굴과 같은 동네에는 절대 오지 말라고 충고를 합니다. 왜 마약상이 됐느냐는 리틀의 말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눈물을 흘리죠. 아마 샤이론과 같은 일이 있었겠죠. 그리고 나서 그는 죽은 것으로 처리가 됩니다. 다시 살아가는 또 다른 후안은 이런 길에 빠져 죽지 않기를 일종의 유령이 되어 알려준다고 할까요. 다행히도 리틀에게는 친구이자 짝사랑하는 대상이자 힘이 되어주는 케빈이 있었죠.

이처럼 <문라이트>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이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즉 양면적인 이야기를 펼칩니다. 인간의 삶이란 게 그렇죠. 비슷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바라보는 달빛이 어떤 종류이냐에 따라서 다양해지는 것인데요. 리틀과 샤이론과 블랙의 엄마가 두 명인 것도 그래요. 실제 엄마 폴라는 약에 절어 정신이 오락가락하죠. 말짱할 때는 리틀에게 다정하게 굴려고 노력하지만, 약 기운이 떨어지면 리틀을 들들 볶아 약을 살 돈을 뺐고 집에도 못들어오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리틀이 의지하는 건 후안과 후안의 여자 친구 테레사(자넬 모네)입니다. 리틀의 기분을 살펴주고 먹을 밥도 주고 잠자리도 제공하고 엇나갈 수 있는 케빈을 다잡아 주는 역할을 하죠.

베리 젠킨스 감독은 <문라이트>를 만들면서 “개인적이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는데요. 우리가 그동안 봐왔던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와는 결이 많이 다르죠. 대개 백인 지배층에 억압받는 모습이거나 인종차별에 대한 은유의 존재로서 흑인을 다룬 영화들이 대부분이었죠. <문라이트>는 다른 인종의 필터링을 통과하지 않은 온전히 흑인의 시선에서 흑인의 삶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는 의미가 있는데요. 보고 있으면 이들의 삶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느껴져요.

베리 젠킨스 감독은 또한 이런 말도 했어요. 다루는 소재와 주제에 적합한 규모와 형식과 삶을 담는 것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말이죠. 이 영화가 다루는 건 시궁창 같은 환경에서도 한줄기 달빛과 같은 의지를 삶의 동력으로 삼은 이의 인생인데요. 그래서 베리 젠킨스 감독은 그 자신이 감독 생활을 꿈꾸면서 달빛이 되어준 영화를 <문라이트>에서 오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목록은 생각보다 꽤 많아요.

먼저 찰스 버넷 감독의 <양 도살자>(1977)를 들 수 있는데요. <킬러 오브 쉽>은 캘리포니아 동부 지역에서 양 도살을 하는 흑인 가족을 다룬 작품으로 <문라이트>처럼 이들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주인공 가족의 엄마는 샤이론의 엄마 폴라처럼 좀 무섭고 그래서 아들은 주눅이 든 모습인데요. 리틀과 샤이론을 연기한 배우들은 바로 <킬러 오브 쉽>의 극 중 분위기와 배우의 연기를 참조해 촬영에 임했다고 하죠.

<문라이트>가 세 개의 시기로 진행하는 방식을 택한 건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쓰리 타임즈>(2006)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쓰리 타임즈는 1911년, 1966년, 2005년을 다루는데 시기를 달리하지만, 주인공 연기는 장첸과 서기가 모두 소화하고 있는 반면에 <문라이트>는 시기마다 다른 배우들이 동일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죠.

원래 베리 젠킨스 감독은 엄청난 영화광이라고 하네요. 많은 영화를 보면서 느낀 남다른 감정이 있다고 해요. 특히 왕가위 영화를 보면서 서로 사랑하지만, 맺어지지 못하는 이들간의 감정을 다룬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해요. 국가도, 인종도 다르지만, 느끼는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해준 매체가 영화였다는 건데요. <문라이트>에는 특히 왕가위 영화의 특정 장면이 많이 연상이 되죠. 예컨데, 블랙이 케빈을 방문하러 갈 때 도로 장면을 보여주는데요. 장면의 구도나 흘러나오는 노래는 다름 아닌 <해피 투게더>(1997)의 오마주죠. 카에타누 벨로주(caetano veloso)의 쿠쿠루쿠쿠 팔로마(Cucurrucucu Paloma)의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모습도 차용하고 있죠.

또 하나 있습니다. <문라이트>에서 샤이론의 가장 중요한 관계인 케빈과 리틀 시절에 운동장에서 뛰노는 장면 있죠. 미국의 뮤직비디오 아티스트인 카일 조셉(Kahlil Joseph)의 <Until the Quiet Comes>(2013)에서 가져왔는데요. 굉장히 흡사합니다. 세면대에 얼음을 채워놓고 세수를 하는 장면은 클레어 드니 감독의 <아름다운 직업 BEAU TRAVAIL>(1999)에서 가져왔고요. <아름다운 직업>은 허먼 멜빌의 고전 『수병 빌리 버드』를 바탕으로 아프리카의 거친 오지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는 여러 인종이 섞여 있는 프랑스의 한 외인부대의 이야기인데요.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막과 그 위의 장엄한 푸른 하늘이 대비되는 가운데 병사들이 훈련하면서 유대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또한, <문라이트>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희망이 없다고 비관하며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에 이르렀는데요. 여전히 어둠이 자욱한 인생이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삶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희망을 품지 않기 때문인데요. <문라이트>를 보니 다른 이유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를 힘들게 했던 주변 사람들과 환경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 나의 삶을 이끌었던 동력이 아닐까, 자문하게 되는 건데요. 우리 삶의 스타일은 제각각이지만, 삶 그 자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죠. 어린 시절을 거치고 국적, 성별, 인종으로 묶이기도 하고요. 그런 삶의 보편성을 담아 내면서 우리가 자주 보지 못했던 흑인을 주인공으로 그들 자신의 필터로 특별함을 부여하는 영화가 바로 <문라이트>입니다.

 

GV <문라이트>
명동역 CGV 씨네라이브러리
(2017.2.21)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가족 관계의 역학에 대해

(* 영화의 관람을 방해할지도 모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장 밀접한 사이지만, 그러므로 더욱 알 수 없어 가족 관계를 탐구하는 영화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도 그런 영화 중 한 편이다. 한국말로 풀자면, ‘바다 마을 맨체스터’ 정도 되려나. 근데 언제부터 맨체스터(Manchester)가 바다를 접하고 있었느냐고? 나도 처음에는 박지성 선수가 활약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속한 영국의 도시가 배경인 줄 알았다. 아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속한 작은 도시다.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는 보스턴의 아파트 관리인으로 근무하며 혼자 살고 있다. 슬픔이 얼비치는 듯한 눈매가 매력적인 리는 자주 여자들의 구애를 받음에도 반응하는 법이 없다. 대신 술에 취해 주변 사람과 시비가 붙을 때면 감정을 폭발시키고는 한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다가오는 여자들도 마다하고 인정머리 없이 매몰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그런 궁금증이 생길 때쯤 리에게 고향에서 소식이 날아든다. 형 조(카일 챈들러)가 심부전으로 위독한 상태이니 급히 맨체스터로 오라는 전갈이다. 살아있기를 바랐지만, 도착하니 형은 숨진 상태다. 임종을 지키지 못해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에서 리는 형이 아들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후견인으로 자신을 지목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내가 고향을 왜 떠났는데, 리는 패트릭을 데리고 보스턴으로 가려 했다가 조카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다.

패트릭은 되려 리에게 보스턴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맨체스터에서 함께 살자며 설득에 나선다. 형이 남겨둔 재산도 있겠다 듬직한 조카도 있으니 받아들이면 좋으련만 리는 택도 없는 소리라며 조카의 의견을 무시한다. 이들은 작은아버지와 조카의 관계가 무색하게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러던 중 리는 전 부인 랜디(미셸 윌리엄스)의 연락을 받고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이 영화의 주요한 배경이 ‘바다’인 이유가 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연출한 케네스 로너건 감독은 가족이리는 테두리 안에 갇힌 구성원들의 심정이란 곧 바다 위를 표류하는 배와 같다고 생각한다. 스포일러(!)를 밝히자면, 리가 고향을 떠난 이유는 몇 년 전 새벽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술을 사기 위해 식료품점을 갔다 오던 중 집에 불이 나 자식 셋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찰 때문이라고 생각한 리는 괴로운 마음에 자살 시도까지 하는 등 고향에서 더는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인과 이혼을 한 후 보스턴에서 혼자 살아가던 중이었다.

삶의 풍랑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잔잔한 수면 위에 떠 있듯 보스턴 생활에 익숙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별안간 형이 죽고 조카를 돌보기 위해 맨체스터에서 다시 생활해야 한다니, 리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안 그래도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는 이들 가족, 더 정확히는 리와 조 형제의 부모님이 소유한 배가 있다. (배의 이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부모님 사후 리와 조와 패트릭은 종종 이 배를 타고 바다를 나가 고기 낚시를 하고는 했다. 형 조가 배를 몰면 리는 패트릭에게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주고는 했다. 바로 이 구도에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묘사하려는 가족 관계의 역학이 압축되어 있다.

조가 세상을 떠났으니 배의 운전대는 리가 잡아야 하는데 리는 이제나저제나 물(?) 밖으로 떠날 궁리만 한다. 언제 또다시 불어닥칠지 모르는 파도를 피하고 싶은 리는 바다와는 거리가 먼 육지, 즉 보스턴이 일종의 피난처와 같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은 리의 심리에 맞춰 연출을 가져간다. 보스턴에서의 일상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속에 이뤄지는 가운데 어느 날 눈발이 날리고 찬바람이 씽씽 불어오면서 형의 병상 소식이 들려온다. 그리고 형의 유언장을 담당하는 변호사로부터 패트릭의 후견인 얘기를 듣고는 리의 현재와 과거가 마치 배의 양옆을 때리는 파도처럼 리를 흔들며 혼란스럽게 교차한다.

가족관계를 자연에 빗대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특별한 사연을 다룬다기보다 보편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물론 리의 심리를 무너뜨린 사연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머무는 동안에는 떠나고 싶고, 떠나있는 동안에는 돌아가고 싶은 가족을 향한 양면적 감정을 이해하는 이들에게 리가 처한 복잡한 상황은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표류하는 배처럼 밀려오면 쏠려나고 쏠려 나면 밀려오는 가족을 향한 모순된 심정을 가지고 있는 많은 이에게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가족의 초상’과 같은 작품이다.

가족의 초상을 내세우는 영화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말고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단지 세상의 끝>(2016) <미스 리틀 선샤인>(2006) <가족의 탄생>(2005) <바람난 가족>(2003) <아메리칸 뷰티> <매그놀리아>(이상 1999) <아이스 스톰>(1997) 등에 더해 아예 가족의 초상이 부제로 들어간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2013)도 있다.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가족도,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들 작품이 모두 공유하는 지점은 오랜 시간을 지지고 볶고 해야 겨우 티끌만 한 정도의 이해와 화해의 폭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마지막은 리와 패트릭이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갑판 위에서 낚시하는 장면으로 할애된다. 이들이 잡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날 저녁상에 올라갈 생선일까? 언젠가 이들이 함께 맞이할 미래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제 리와 패트릭이 새로운 가족을 이뤄 이 배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이 리와 패트릭 간의 절대적인 화해를 의미하는 건 아닐 테다. 가족이란 구성원 모두가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혈연이라는 운명에 묶여 반목하고 화해하고 다시 싸우고 손잡는 일을 반복하며 평생을 보낼 존재들이다.

리와 패트릭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또 부딪힐 테고 때때로 서로의 품 안에서 온기를 느낄 것이다. 이들에게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그렇게 좋던, 나쁘던 가족 관계에 풍화 작용을 일으켜 매 순간 새로운 가족의 의미를 부여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정의를 내릴 수 없어도 관계의 역학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ARENA
2017년 3월호

[예스 24] <더 큐어> 건강한 당신을 치료해 드립니다

나를 포함해 주변을 둘러보면 육체적으로 건강해 보여도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 천지다. 전 세계적으로도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넘쳐난다. 전쟁에, 기아에, 종교와 인종 갈등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좌절과 상실감에, 더 멋있고 예뻐지고 싶은 지나친 욕망 등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병들어 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이를 치료하겠다며 관련 병원이 생기고 사설 의료 기관이 판을 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치료제가 난무한다. 고어 버빈스키 감독이 연출한 <더 큐어>는 사회가 점점 더 비이성적이 되어 가면서 병 자체보다 치료법이 더 끔찍해지는 상황을 다룬다.

록하트(데인 드한)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불법(?) 정도 쉽게 감행하는 젊은 야망가다. 그가 속한 대기업의 CEO가 정신이 나간 듯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다. 그를 데려오기 위해 록하트는 스위스의 알프스에 위치한 ‘웰니스 센터’로 향한다. 깊은 산 정상에 위치해 위압적이면서도 비밀스러운 이곳에는 한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심신을 치유하겠다며 몰려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사이에서 유독 록하트가 찾는 CEO만 눈에 띄지 않는다.

센터 측에서 CEO와의 면회를 의도적으로 막자 록하트는 뉴욕 본사로 돌아가 이를 알리려 한다. 기차역으로 향하던 중 차 사고를 당하면서 록하트는 정신을 잃는다. 깨어나 보니 3일이 지난 상태다. 게다가 다리까지 골절되어 깁스를 하고 있다. 웰니스 센터의 담당자는 다친 다리도 물론이지만,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며 요양을 권한다. 특히 이곳에서 나오는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해 이를 따르니, 록하트의 시야에 헛것이 보이는 듯하다. 그때 맞닥뜨린 의문의 소녀. 웰니스 센터를 빠져나가려는 록하트에게 무시무시한 말을 전한다. “지금껏 여기를 떠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더 큐어>의 원제는 ‘A Cure for Wellness’다. 한국말로 풀면, ‘건강하게 하는 치료’ 정도의 의미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Wellness’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건강한 사람’이다. 건강한 사람을 위한 치료? 상식적으로 그런 게 필요할 리 없다. 이 제목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전제되어야 한다. 모두가 성공을, 돈을, 아름다움을 향해 달려드는 세상도 그중 하나다.

같은 목표를 향해 경쟁적으로 달려드니 웬만한 성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갖고 있으면서도 남들보다 가진 게 없다고, 남들이 나보다 훨씬 멋있고 예쁘다고 좌절에 빠지거나 타인을 음해하고 종국에는 사회 자체를 비이성적인 감정의 불구덩이로 몰아넣는다. 더 욕망하지 않았으면 굳이 치료가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지나치게 바라는 마음으로 인해 심리의 상처를 입어 불필요한 치료를 열망하는 현대인들. <더 큐어>는 이런 상황을 웰니스 센터로 은유한다.

컵 표면에 맺힌 이슬을 카메라가 초(超)근접 하여 예민하게 포착하는 이 영화의 촬영술은 향정신성 의약품을 복용하듯 보고 있으면 취한 기분에 빠져든다. 그런 치료제를 복용하니 몸이 낫는 게 아니라 약 자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정신의 미로 상태에 갇힌다. CEO를 봤다는 사람은 많아도 어찌 된 일인지 록하트는 그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CEO. 아니, 그 무엇. 그럴 때마다 록하트는 마주하기 싫은 자신의 내면으로 침전하는 듯한 느낌에 휩싸인다.

내면의 목소리는 진실인 경우가 다분하다. 그 진실을 부러 외면할 때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 마음의 병을 얻는다. CEO는 편지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 안에는 병이 숨어 있네. 역류한 담즙처럼 목구멍에 쓴맛을 남기는 병이. 탁자에 둘러앉은 자네들도 마찬가지일세. 치료법도 원인을 알아야 찾는 법이라네.” 록하트는 겉으로 멀쩡해도 젊은 나이에 너무 성공에 집착한 나머지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져 있다. 야망으로 포장된 성공과 돈에 취해 점점 멀어져가는 진실을 잡기 위해 내면의 미로를 헤매는 상태다.

이 미로의 정체는 실은 역사다. 록하트로 대변되는 현대인의 마음의 병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물질을 향한 도 넘은 사랑, 권력을 향한 끝없는 욕망, 미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 등은 옛날 사람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웰니스 센터에는 근무하는 의료진이나 요양하는 환자들이나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죽을 날이 머지않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갖은 욕망에 대한 아쉬움으로 이를 더 누려보겠다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이들의 최종 절차는 괴물로의 몰락이다. 지금 록하트와 의문의 소녀는 반복되는 역사의 갈림길에 직면했다. 그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과감한 판단이 필요하다. 지나친 욕망은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당신은 욕망의 미로 ‘웰니스 센터’에서 탈출할 의지가 있는가.

 

예스 24
‘허남웅의 영화경’
(2017.2.16)

[GV] <퍼스널 쇼퍼>

(*GV 준비를 위해 생각난대로 쓴 글이라 문장이 둔탁거려요.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예술영화와 장르영화를 구분하지 않고 만드는 감독으로 유명하죠. <보딩게이트>와 <카를로스>는 범죄물이라고 할 수 있고요. 또한, 여성의 이야기도 많이 만들어왔죠. 장만옥과 함께 했던, 심지어 그녀와 결혼까지도 했는데요. <클린>이라는 작품이 있었죠. 한국에도 개봉했던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에서는 줄리엣 비노쉬와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클로이 모레츠와 함께 했습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특징은 이 배우들의 현실의 모습을 영화 속에 투영한다는 점일 텐데요. 일례로,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에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이제는 나이를 먹어 젊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줄리엣 비노쉬의 현재와 20대 배우 중 가장 잘 나가는 클로이 모레츠의 현실을 영화 속에 직접 반영해 줄리엣 비노쉬가 클로이 모레츠를 질투하는 역할을 주기도 했어요.

요는,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어떤 경계를 두지 않고 언급한 영화 속 배우의 활용처럼 오히려 경계를 허물어 영화와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연출을 선보인다는 데 있는데요. 지금 소개할 <퍼스널 쇼퍼> 또한 그러하죠.

<퍼스널 쇼퍼>의 첫 장면은 감독의 그런 연출 성향은 물론 이 영화를 이해하는 일종의 가이드이기도 한데요. 주인공 모린(크리스틴 스튜어트)은 쌍둥이 남매였죠, 루이스의 영혼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고저택으로 루이스의 전 여친과 함께 방문합니다. 이때 카메라는 철창 문 뒤에서 다가오는 모린 일행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을 그대로 보여주죠. 경계를 넘어서는 이야기와 이미지를 선보이겠다는 선언 혹은 가이드 같은 것이죠.

안 그래도 철창 문이 열리면서 모린 일행이 들어오는 건 현실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들어온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그처럼 <퍼스널 쇼퍼>에서 현세와 영의 세계를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 구분지어지는 모든 개념을 허무러트려 혼재하는 세계로 만들어버려요. 그래서 이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와 두 번째 시퀀스의 편집은 그런 개념을 적용해 보여주고 있는데요. 모린이 저택에 들어와 살피는 낮 장면이 이어지다가 테라스에 나가 바뀌어라 뿅! 하듯 라이터에 불을 붙이는 순간 마치 하나로 연결된 듯 밤 장면에 모린이 다시 저택을 이리저리 살피는 장면으로 이어져요.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낮과 밤’ 정도 될 것 같은데요. 이런 편집의 장면에서 저는 화가 M.C. 에셔의 <낮과 밤>이 연상되더라고요. M.C. 에셔는 초현실주의 화가로도 유명한데 안 그래도 <퍼스널 쇼퍼>에는 추상화가의 선구자 ‘힐마 아프 클린트’가 언급되죠. 예, 영화를 위해 창조한 화가가 아니라 실제 화가입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그렇게 현세와 영의 세계, 현실과 초현실세계, 추상과 구체의 세계, 심지어 장르영화와 작가영화 등을 구분하지 않고 공존하는 세계로 그리고 있죠.

모린과 루이스의 쌍둥이 남매 설정이 의미를 갖는 것은 하나라고 생각했던 반쪽이 떠나가면서 공백이 된 그 반쪽을 찾는 이야기인 건데요. 그래서 이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가 마치 거을상처럼 마주 보는 구조이죠. 영매인 모린이 유령이 된 쌍둥이 오빠와 만나려하는 예술영화, 그리고 퍼스널 쇼퍼 모린이 키라의 살인 사건에 연루되는 공포 혹은 스릴러 장르영화가 함께 진행되다가 서로 하나가 되는 구조인 것이죠

이에 대해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환상과 꿈, 두려움과 씨름한다. 이것들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매우 실제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유령은 우리의 기억, 잠재의식과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에 모두와 관련될 수 있다.” 그래서 <퍼스널 쇼퍼>의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인간과 유령이 공존한다는 믿음 하에 추상적 존재인 유령을 실제적인 존재로 그려내고 있죠.

하지만 서로 반대되는 개념의 세계로 하나로 엮기 위해서는 이를 이어줄 대리의 존재가 필요한데요. 바로 여기에 이 영화의 제목인 ‘퍼스널 쇼퍼 Personal Shopper’가 의미를 갖습니다. 일차적으로 극 중 모린의 직업이 퍼스널 쇼퍼이죠. 잘 나가는 엔터테이너 키라가 너무 바빠 대신 옷과 장신구를 찾아다 주는 등의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이차적으로는 ‘영매’를 의미하죠. 모린은 극 중에서 여러 번 자신은 영매라고 합니다. 심장병으로 먼저 죽은 쌍둥이와 살아있을 적에 누가 먼저 죽게 되면 둘 모두 영매이니 함께 만나자고 약속까지 한 상태이죠.

‘대리하는 행위’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퍼스널 쇼퍼>에는 대리하는 행위와 기구들이 많이 등장해요. 이 영화에서 희한하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문자 메시지 시퀀스가 있죠. 스마트폰이 바로 연락을 주고 받는 사람들을 대리하는 기구인데요. 스마트폰이라는 게 앞에 대화를 나누는 대상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대상과 대화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영매’ 같은 것이죠.

또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유독 기차와 지하철 장면이 많아요. 목적지를 연결해주는 교통 수단인데요. (그래서 이 영화의 화면비는 기차처럼 긴 2.35:1의 화면비를 갖고 있죠.) 특히 문자를 나룰 때 기차, 더 정확히는 런던과 프랑스를 잇는 유로스타이죠. 바로 유로스타에서 나누는 문자 메시지 시퀀스는 죽은 쌍둥이 남매에게서 신호를 받은 후 모린이 긴가민가하는 상황에서 바로 벌어지는데요. 그 의심을 어떻게 보면 실제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장면이랄 수 있을 텐데요. 그래서 기차가 이동하는 장소를 도버 해협을 건너야 하는 런던과 파리의 유로스타로 잡아주고 있죠.

그러니까, <퍼스널 쇼퍼>에는 유령을 인식하는 과정이 단계별로 제시되는 듯한 인상이죠. 영매인 모린이 십(+)자 표시를 발견한 후 스마트폰을 통해 유령과 대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확인의 단계를 거친 후 뒤에 가면 실제로 모린의 쌍둥이 형제가 모습을 드러내죠. 그런 식으로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모린이 퍼스널 쇼퍼의 의뢰인으로 모시는 키라의 옷을 입는 순서로도 드러나요.

문자 시퀀스에서 유령인지 혹은 잉기인지 알 수 없는 대상이 “금기 없인 욕망도 없지”라고 문자를 보내죠. 현세에서 영의 세계는 일종의 금기의 세계인 것처럼 퍼스널 쇼퍼인 모린에게 의뢰인의 옷을 입는 것 또한 금기입니다. 하지만 모린은 퍼스널 쇼퍼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키라처럼 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으로 보여요. 구두를 받으러 간 곳에서 디자이너가 한 번 신어볼래, 라고 하자 모린은 볼멘소리로 예전에도 한 번 그랬다가 당신이 키라에게 고자질해서 혼났다는 얘기를 하죠.

그래서 키라의 옷을 입는 순서는 좀 조심스러워요. 일단 갑작스럽게 모린이 상의를 탈의하고 심장병 검사를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퍼스널 쇼퍼 직업인으로, 정말 영의 세계가 존재하는지 의심하는 영매로서 자신이 그어놓은 의심의 선을 조금씩 넘는 과정을 이 영화는 모린이 키라의 옷을 서서히 갖춰 입는 과정과 등치해요. 그래서 신발을 신는 장면 그 뒤에 체형 속옷을 입는 장면, 문자 시퀀스 후에 키라 집으로 가 그녀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아예 검은 옷으로 갖춰 입죠. 그리고 나서 행하는 자위 행위, 유사 섹스 관계인데요. 섹스는 일종의 하나 됨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검은 옷은 유령을 불러내는 영매를 연상시키죠. 모린의 현세와 영의 세계, 삶과 죽음 등 모린을 둘러 싼 구분되는 개념 등이 하나로 합쳐짐을 자위행위로 드러내는 겁니다.

그때 자위하는 모린의 옆에 등장하는 유령의 모습. 근데 우리는 그 유령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 전에 모린의 쌍둥이 형제 루이스와 접촉(contact)하겠다며 간 그 저택에서도 유령을 만났었는데요. 잔뜩 화가 나 있고 모린을 향해 폭력적인 유령은 루이스의 것 같지 않습니다. 현세와 영의 세계를 대리하는 모린은 혹시 그 저택에 머무는 다른 령을 대리하여 키라의 집으로 데리고 간 것이 아닐까요. 그 영은 혹시 키라에게 원한이 있어 키라와 한동안 불륜 관계였다가 헤어진 보그 지의 잉기로 하여금 키라를 죽이게 했던 건 아닐까요.

의문은 또 있습니다. 키라의 시체를 확인한 모린이 거실로 나왔을 때 맞은편 문쪽에서는 영들끼리 다투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영화에는 그런 대사가 나오죠. “죽은 자가 산 자를 보살핀다죠.” 그러니까, 모린을 보호하기 위해 루이스의 영이 폭력적인 영매와 싸움을 벌인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건 이 영화를 보고 해석하는 관객의 몫일 겁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퍼스널 쇼퍼>를 두고 이런 얘기를 했죠. “우리의 인식 혹은 상상과 현실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영화다. 나는 유령을 보여주기만 했을 뿐 그 누구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완전히 열어 놓았다.”

그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고작 유령을 보여주었다고 다양한 해석의 폭이 열리는 것은 아닐 겁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말한 ‘모호함’ 그 정체는 현실과 환상, 현세와 영의 세계, 추상과 구상 등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모호함 투성이입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캐스팅 자체도 그런 모호함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하죠. 그녀의 중성적인 매력은 개념을 구분하지 않는 이 영화의 콘셉트를 고려할 때 딱 맞아떨어지는 조건이죠.

모린의 쌍둥이 형제 설정도 그래요. 쌍둥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죠. 모린과 루이스, 남과 여, 인간과 유령 등 모린이 찾는 건 결국 자신의 반쪽이라고 할 수 있죠. 모린이 찾는 반쪽의 개념이 환상과 영의 세계와 죽음과 같은 현재의 모린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에요. 거울상 같은 개념이죠. 안 그래도 <퍼스널 쇼퍼>는 거울 장면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모린의 쌍둥이적인 측면을 묘사해요. 예컨대, 키라를 위해 은박 옷을 구하러 갈 때 숍에서 모린이 이를 자신의 몸에 대보는데 카메라는 우선 거울 속 모린을 비춰 그녀가 한편으로 자신의 현재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옷의 직업을 꿈꾸고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다가 스스르 빠져나오듯 이동해 현재의 모린을 비춰주는 식이죠.

<퍼스널 쇼퍼>의 카메라 운용 자체가 그래요. 사실 카메라는 영화 속 세계와 현실에 존재하는 관객의 세계를 대리해주는 기구죠. 그래서 이 영화의 카메라는 극 중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영화의 눈이면서 또 한편으로 모린 곁을 따라다니는 루이스 혹은 다른 귀신의 시선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죠. 다시 말해, 양면성.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언급한 모호함과 양면성은 모두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죠.

이 영화의 마지막도 그렇게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키라 살인 사건의 용의자에서 풀려난 모린은 남자 친구가 있는 오만(인가요?)로 여행을 떠나죠. 그곳 숙소에서 모린은 유령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루이스 너야?” 아무 반응도 없습니다. “루이스 너야 그럼 내가 유령이야?” 바닥을 치듯 울리는 소리 한 번. 그럼 모린은 유령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땅을 밟고 있는 너머의 세계를 자각한다는 것. 쿵, 하는 소리는 모린의 자각을 알린 내면의 소리는 아니었을까요. 앞으로 그녀는 과거와는 다른 인식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겠죠.

 

<퍼스널 쇼퍼> GV
아트나인
(2017.2.15)

2017 오스카, 이변을 부탁해

89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현지 시각 2월 26일 열리는 이번 시상식은 14개 부문에 후보를 올린 <라라랜드>의 독주가 예상되는 가운데 <문라이트>와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대항마로 나선 형국이다. 근데 아카데미가 언제 예측한 대로 흘러갔던 적이 있었던가. 지난해 <스포트라이트>는 12개 부문 후보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제치고 작품상을 받으며 이변을 연출했다. 아카데미는 주요 상 한두 개 부문에서 늘 예상치 못한 수상으로 극적인 순간을 연출했다. 올해 이변이 생긴다면 그 주인공은 누가 될까.

작품상 다크호스로 꼽고 싶은 영화는 <로스트 인 더스트>다. 은행 강도질을 일삼는 형제를 통해 서부 사나이의 몰락을 그린 작품이다. 트럼프 시대를 맞이하여 미국은 그동안 추구했던 자유와 다양성의 가치가 위협받고 있다. 지금과 경우는 달라도 9.11 이후 미국은 외부로는 테러 위협으로, 내부로는 금융 위기에 따른 경제 악화로 위기를 겪었다. 이에 미국의 가치에 의문을 표하는 작품들이 독립영화 진영에서 발표됐다. 2008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가져간 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었다. 미국을 긍정하는 영화에 호의적이던 아카데미의 보수성을 깨는 파격의 결과였다. 2017년 미국 안팎으로 감지되는 위기감은 2008년 당시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서부를 우회해 미국의 현재를 진단하는 <로스트 인 더스트>는 제2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2013년 이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수상의 관계를 보면, 2015년 <버드맨>을 제외하고는 한 영화가 모두 가져간 적이 없었다. 작품상으로 <라라랜드> <문라이트>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중 하나가 가져간다면, 감독상으로 추천할 만한 영화는 <컨택트>다. <컨택트>는 언어학자가 지구에 온 외계인의 언어를 알아가는 사연을 다룬다. 이 영화가 원작 삼은 테드 창의 단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영화화가 불가능한 작품으로 악명(?)을 떨쳤다. 외계인과 인간의 언어를 비교하며 이야기를 꾸려가는 소설은 영화로 옮기기 난해했던 까닭이다. <컨택트>를 연출한 드니 빌뇌브 감독은 원작의 주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대중적으로 접근해 전에 본 적 없던 내용의 영화로 완성했다.

남녀주연상으로 유력한 배우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케이시 애플렉과 <라라랜드>의 엠마 스톤이다. 모두 오스카를 처음 손에 쥐는 거라 지금쯤 시상식을 기다리며 밤잠을 설치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김칫국부터 마시지 않기 위해서는 더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할 가능성이 높은 선배들을 넘어야 한다. <펜스>의 댄젤 워싱턴과 <플로렌스>의 메릴 스트립이다. 덴젤 워싱턴은 지난 2002년 <트레이닝 데이>로 이 부문 상을 받았다. 1964년 <들백합>의 시드니 포이티어가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후 흑인 배우로는 무려 38년 만의 경사였다. <펜스>로 덴젤 워싱턴이 받게 되면 흑인 배우 최초의 두 번째 수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메릴 스트립의 이번 후보 지명은 무려 20번째로 아카데미의 기록이다. 수상도 이미 세 차례나 있었다. 다시 이름이 호명되면 무려 4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가게 된다. 그 자체로 아카데미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셈이다.

올해 아카데미는 유독 변수가 많다. 지난해 백인 일색의 후보와 수상자 지명으로 곤란을 겪었기 때문에 올해 더욱 유색 인종 배우와 작품에 신경을 쓰는 분위기다. 또한, 트럼프의 반이민정책 영향으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선정된 이란 출신의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세일즈맨>)은 시상식 불참으로 항의를 표했다. 안 그래도 메릴 스트립은 지난 8일 열린 74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세실 B 데밀 상을 받으며 트럼프를 향한 비판으로 수상 소감을 대신해 눈길을 끌었다. “오늘 시상식장은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비난받는 외국인들과 미디어 종사자들로 가득 차 있다” 그에 따라 이번 아카데미가 어떤 시상 결과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질지 관심이 높다. 그만큼 이변의 가능성이 높은 시상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겨례
(2017.2.13)